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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생활

추모시 - 지나가는 자들이여, 잠시 멈추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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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이 물었다. 선생님,

 

한 생이 다하도록 해야 할 게 있다면

그게 뭘까요. 선생은 머뭇걸리지도 않고 바로 말했다.

그거? 용서하는거야.

 

II

 

그분이 가셨다.

2009년 8월 18릴 오후 1시 43분,

나는 성프란시스고 회관으로 걸어갔고

정동 오래된 느티나무의 더 굵어진 빗방울이

우산에 후두둑 마침표들을 찍었다.

그때 세브란스 뒤편 백양나무숲도 진저리를 쳤으리라.

한세상 우리와 함께 숨 쉬었던 공기 속에

한분의 마지막 숨결이 닿았을 때

소스라치며 빗물을 털어내는

백양나무의 그 무수한 낱말들;

그분이 가셨다고, 그분이 가셨다고

어디선가 문자 메세지들이 연달아 들어오고,

광화문 광장, 꽉 막힌 차량들 사이로

잠시 짜증을 멈추고

사람들은 인왕산으로 몰려가는 먹구름을 보았다.

지하철 계단을 바쁘게 뛰어오르던 자들도,

담배 피우러 복도 난간애 나온 젊은 사원들도,

기차역 대합실의 늦은 휴가객도, 증권거래소와

통신사 사람들도 뭔가, 순간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시간의 정지 속에 멈춰 있었다.

그분이 가셨다.

 

III

 

당신이 잠시 붙들어 놓은 시간 속에, 이젠 모자를 벗고 머

리 숙이는 길손들은 없지만,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가 잠

깐일지언정 당신을 생각했을 거예요. 돌이켜 보니, 우선

우리가, 당신과 참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고요, 여든 다섯 성상의 굴곡 많은 당신의 생을 가로지

르는 동안 우리가 당신의 동시대였다는 게 자랑스러워요.

"나는 그때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영광의 대가로

끌려가서 고생한 사람들도 많았지만요. 저는 당신을 한마

디로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은 '목소리', 그래요, 목소리였

던 같아요. 당신은, 우리 젊은 날, 그 모질고 깜깜했던 얼

어붙은 시대를 건너오는 목소리였어요. 당신 가슴속 다이

몬에서 나온 그 목소리, 하마터면 비굴해질 뻔했던 우리

를 다시 세우고, 우리가 헤멜 때 꼭 어떤 곳을 가리켰던

그 목소리에는 때로는 전율과 눈물이 때로는 얼마간의 피

가 섞여 있었지요. 언제였던가요, 대구 유세 때였을가요,

그 목소리는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하지 않고 주문 걸린

시대의 맹목을 향해 준열히 꾸짖음으로써 돌멩이들을 허

공에 정지시켰드랬습니다. 그 피맺힌 목소리를 우리는 잊

지 못합니다. 또 당신이 통곡을 터뜨리는 몇몇 장면들도

우리는 잊지 못합니다. 순안 공항에 내렸들 때 트랩 위에

잠시 서서 동원된 환호성 대신 멀리 붘녘 산하를 망연히

바라보시던 당신 모습을 정말 잊을 수 없어요. 테러, 납

치, 가택연금, 목숨을 요구하는 군사법정 그리고 투옥으

로 점선을 이루는 당신의 생의, 정말 파란만장이라는 말

로도 모자란, 그 유명한 드라마 가운데 아마 그때가 최정

점이었겠지요. 참, 당신처럼, 한세상 나와서 인생을 이렇

듯 엄청난 용량으로 살아낸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요? 당

신이 대단하다는 건 바로 그거라고 생각해요. 세상의 온

갖 욕됨까지 다 받아들이고 그 숱한 사람들의 소람을 다

담아 '한껏' 사셨다는것. 최선을 다하여 살아냈다는 것.

생을 한 점 그을음 없이 다 태워냈다는 것. 그 가운데 우

리가 가장 경이롭게 생각하는 건 이거예요. 우리가 아무

리 따라 하려해도 잘 안되는 걸 당신은 하셨는데요, 그건

용서였어요. 우리도 삶의 나이테가 굵어지면서 그 안에

꼭 한두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자 혹은 용서하기 힘든 자

들이 나타나 새벽의 어둠 저편을 노려보게 되거든요. 그

러나 당신은 당신을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었던 사람들의

두려움을 기꺼이 풀어주고, 끊임없이 당신을 모략의 언어

로 주문을 거는 자들까지 마침내 당신의 주검 앞으로 불

러냈습니다. 아, 그래요, 용서하였으므로 당신의 생은 위

대합니다. "그렇게 해서",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이 세상에서 뛰었던 당신의 맥박과 혈압을 스스로 내려놓

으시고 이 땅에 함께 쉬었던 숨을 스스로 다 내쉬고 당신

은 이 지상의 생을 완성하셨습니다. 지금, 당신을 영원한

잠에 들게 한 저 관 속에는 이 땅에 슬픔을 가진 모든 어

머니들의 눈물을 대신 닦아낸 손수건이 당신 가슴 위에

놓여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세상의 눈물을 가지고 가시

는 당신, 아름답습니다.

 

IV

 

호모 에쎄, 에쎄 호모,

이 사람을 보라,

지나가는 자들이여 잠시 서서 보라,

여기 한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그를 묻는 것은 망각이 아니라

어떤 약속을 심는 것이다.

 

V

 

하의도 동쪽 기슭,

일제히 뒤집어지는 풀섭에서

흑염소들이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네

먹구름 밀어내는 은박의 바다를.

 

시인 황지우

경향신문 2009년 8월 24일

 

 2009-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