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05 20:05
2009년 5월 16일, 오체투지 103일째. 비가 많이 온다. 수경 스님, 문 규현 신부, 전 종훈신부. 그 들을 따르는 사람들. 과천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날. 친구네 결혼식은 가지 않기로 정했고 오전에 오늘 오체투지 사작점인 과천으로 갈까 생각하다 시간이 지났고 방배동을 지나고 있는 걸 아프리카로 보았고 거기에 가지도 않았고...이렇다가 안되겠다 싶어 용산 화재 현장으로 갔다.
오늘 미사가 있고 오체 투지 성직자 (이럴 때 딱 맞는 단어이다)들이 그곳으로 온다고 되어있어 그 뒤에 서서 감사를 드려야 될 듯했다. 감사를 드린다기보다 그 뒤에 서 있으면 당신들의 뜻을 알고 있다는 표시가 될 거 같았다.
다섯시쯤 녹사평 역에 내렸다. 미군부대앞, 국방부 앞 길을 걸어 용산으로 향했다. 나무가 굵고 잎이 무성하여 이 길을 좋아한다. 미군부태와 국방부 담과 인도 사이 경사지에 모란(함박꽃)이 많이 피엇다. 굵은 꽃 덩어리, 풍만한 꽃 잎, 화려한 색. 모란 잎도 아름답다.
보아도 보아도 또 보고 싶고 어쩌다 보면 반가운 모란.
비는 그쳤고 공기는 축축하고 정갈하다.
밥 집, 소주 집, 생선 구이, 철물점...이 줄 늘어서 있던 골목. 5충 건물 내부는 타서 내부가 허물어 져 있었고 경찰버스가 담 처럼 둘러쳐 있었다. 마주 본 건물들은 외부가 타서 창틀이 흘러 내렸고 비에 젖어 꼴이 처참했다.
그 건물들 사이로 난 골목이 미사장소이다. 나는 한강로 쪽에서 시작되는 미사 단 앞 쪽에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모인 끝에 서 있다가 신부강론을 듣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미사가 끝나고 작은 노래 모임들이 나와서 노래를 하였다. 나는 다시 무리들의 뒤쪽으로 가서 골목을 걸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다 떠나고 아직 남은 몇 상점들이 행인 없는 길에 불키고 빗 속에 누워 있었다.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를 포장이 둘러쳐진 모퉁이를 걸어 다시 미사 앞쪽으로 와서 섰다.
두번째 노래 팀이 우리 모두 기운을 내자고 흥을 돋으려 노래 부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박자에 맞춰 손벽을 치고 있었다. 흰수염 문 신부가 앉아 있는 옆으로 가족을 불길에 잃은 유가족아주머니들이 가슴에 영정을 안고 고개 숙이고 있었다. 위로하러 온 사람들의 힘을 내라는 손뼉 속에 아주머니들은 아주 피곤해 보였다. 나중에 안 건데 미사는 매일 저녁이면 있었고 그날은 유가족과 문신부 모두 오체 투지단과 낮 시간을 함께 한 후였다. 내가 그녀들이라면 몸도 마음도 가루처럼 부서져 빗속에 흘러내려 버리고 싶을 듯 했다...지금 들리는 응원의 노래, 손뼉이 그녀들에게 위로가 될까....
노래가 끝나고 젊은 신부가 마이크를 잡고 앞에 섰다.
"그 분들, 이곳에는 못 오셨지만 제가 과천운동장에 갔었습니다....신부님, 수경스님이 망가진 몸으로 단 위에 서셨습니다. 문 신부님 절름발이 되었고 정 신부님, 손목이 나갔습니다. 버러지처럼 이 땅을 백 일 넘게 기어서 이곳까지 오셨습니다. 단 위에 올라 그분들, 묵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그분들의 묵언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인간이 되자. 우리 모두 인간이 되자...누구만이 인간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걸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젊은 신부 말이 폭우처럼 내 머리위로 쏱아졌다. 누구도 버러지가 아니고 짐승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인간으로 대접하라고. 대접해 달라고.
눈물이 났다. 닦았다. 없어 고통받고 없어 불타죽은 여기 이이들 아픔을 느끼라고....눈물이 자꾸났다. 어쩔줄을 모르겠다.
아픔을 알고 기쁨을 느끼는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라는 우리가 우리에게 하는 요구... 생명에 대한 당연한 요구, 소박한 말씀이 가슴속에파도처럼 휘돌았다.
미사가 끝나고 삶들이 흩어지고 유족들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피곤한 얼굴로 영정을 안고있던 아주머니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주고 싶어 다가갔다. 그이를 안았다. 그이의 가슴이 내 가슴에 닿는 순간, 그이의 아픔과 분한 마음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위로를 드리고 싶었어요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게서 눈물이 쏱아졌다. 생면부지의 아주머니를 붙잡고 그 아주머니도 울엇다. 진정, 위로를 드리고 싶었어요....
그 아주머니들이 돌아간 곳은 미사자리 옆의 천막이었다. 초라한 깔판위에 담요, 난로등이 있었다. 그곳에서 기거하는 듯했다. 다른 아주머니에게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 중 한 아주머니가,
고맙다고, 우리들에게 힘을 주시는 분들이 많다고, 고맙다고 했다. 이 현실앞에서 고맙다니...
그 아주머니는 눈물이 다 마른듯 했고 나는 왈칵 눈물이 났다.
부은 눈으로 빗 속에 불빛에 번쩍이는 한강로를 걸어 삼각지 역으로 왔다. 철거할 건물들 사이로 상점들은 비어있고 주말 저녁의 거리는 달리는 차를 빼곤 침묵했다. 마치 사람을 배제하는 듯한 거리. 빈 건물, 불꺼진 상점들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잇었다.
신부는 스님은 자신을 버러지처럼 끌고 여기까지 왔다. 그들의 몸은 더이상 인간의 육체가 아니다. 깨워야 할 영혼들에게 바치는 그들 영혼의 형상일 것이다. 그들 스스로 시대와 정권이 내리치는 대못을 가슴에 무릎에 박고 지치고 헤어진 육신을 끌고 나 같은 사람도 흔들고 끌어내고 잇다.
왜 울었을까. 난데없이 내게 쏱아진 그건 무엇이지? 아주머니를 안았을 때 가슴으로 확 밀려들어온 건 무엇이지? 그것은 공감일 것이다.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공감.
무방비상태의 약자들을 생명으로 대접하지 않는 권력에 대한 분노.
소수이고 약자라고 살던 곳에서 몰아내고 사회의 구석에 쳐박아 놓는
사회의 야만성에 대한 분노.
공권력을 등에 업고 살던 땅을 빼앗고 건물을 올리려는 기업들은
총과 칼로 원주민의 땅을 빼앗던 식민지 정복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외면하는자 모두 생명에 무지한 야만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