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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오래된 일기-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가 왔다.

외할머니 친할머니 아니고 내 아이들 키워준 할머니를 아이들은 우리 할머니라고 불렀다.

 

우리 할머니가 우리집에 찿아왔다. 옛날 처럼 일찍 일어나서 집 주소 움켜쥐고 옛날 전화번호 들고 택시 운전수에게 아파트 물어 찿아 왔다. 낡고 때 탄 비닐 크로스 백을 둘레 메고. 가방 속에서 아이들과 할머니와 살면서 찍은 사진, 작은 애 어릴 때 예쁜 원피스 입고 찍은 사진, 중학 입학 증명 사진등을 꺼낸다.

"내가 죽으면 다 태워 없앨 거 아녀, 그래서 돌려주고, 보고 싶어서 왔어"

"전화를 맨날 했어, 노인정서. 암만해도 전화가 안돼. 이민 강게다 했어"

할머니가 쥐고 있던 전화 번호 하나는 누구 것인지 모르겠고 다른 번호는 없애버린 집 유선 번호이다.

 

할머니가 57살, 큰 애가 6 개월 되었을 때 우리 집 와서 아이들 20년 키우고 내 살림 20년 s넘게 살아 주고 1999년 3월에 우리 할머니네 며느리에게 돌아갔다. 지금 여든 넷인가? 우리 집 떠나기 전날 밤, 다 큰 두 놈이 할머니의 일인용 침대에 낑겨 누워 함께 잤다. 그 날 찍은 사진을 보면 할머니 표정이 우울하다. 20년을 내 손자처럼, 내 살림 처럼 살다가 남 같은 며느리 아들네 집 옥탑방으로 가는 기분은 행복하거나 기대에 부플 수 없지.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모은 돈으로 며느리에게 옥탑방 전세값 대체해 주고 들어갔다.

 

할머니 간 뒤로 한 번도 못 보았다. 한 삼년 전 전화번호 어찌어찌 찿아서 할머니 매일 간다는 노인정으로 통화 한 게 한번.

그 때 "몸이 아퍼. 어디고 할 거 없이 쑤시고 아퍼"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할머니, 내가 찿아 갈 게. 애들 데리고 가서 할머니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게" "꼭 와유. 꼭" 그렇게 약속 했는데 그 이후 몇 년을 생각만 했을 뿐 찿아가지 못했다. 아이들도 모두 한 번 가자 했으나 시간 맟추고 함께 움직이기 어려웠다. 할머니 가고 나서 못 본 기간 내내 빛 지고 있다는 생각이 큰 숙제를 안고 사는 거 같았다.

 

갑자기 할머니가 아파 누웠으면 어쩌나, 맛 있는 거 밖에서 사드려야 하는 데 어쩌나 싶은 생각에 지난 주에 은행동 노인정 번호를 찿아서 할머니를 찿았다. 조씨 노인네가 있다고 하는 곳도 있었고 없다고 하는 곳도 있었고. 암튼 한 군데씩 들러서 사진 보이면 찿을 수 있겠지.... 암튼 노인정으로 가 봐야지....할머니와 찍은 사진 골라놔라 해서 가방속에 챙겨 놓았던것이 지난 주.

혹시 싶어서 버리려던 수첩에 있는 옛 번호로 걸어 보았다. 전화 받는 아주머니에게 할머니 손자 이름을 대니 그 집이다. 할머니는 노인정에 갔단다. 내 번호를 남길 생각은 못했는데, 그 쪽에서도 내 번호를 물을 생각을 못 한거 같다.

 

일요일 아침 잠 3할은 아직몸에 남아 마루서 왔다갔다 하고 있는데 문 밖에서 사람소리가 나기에 누구세요 하니 " 나 여, 나" 하는데 옛날 목소리 그대로 말 투 그대로다.

작은 놈은 방에서 뛰어나와 할머니를  끌어 안고 운다. 할머니 무릎에 머리 베고 소파에 길게 눕는다. 강아지 새끼도 전에 본 사이라는 듯 할머니와 작은 놈 사이에 낀다.

 

점심 먹으로 밖으로 나가는데 보니 할머니 키가 줄었다. 겨드랑이를 잡아도 걷는 다리가 무겁다. 얼굴에는 검은 혹이 드믄드믄 앉았고 우리 집에 오기전에 부러진 어긋난 손목 뼈는 더 어긋나 있는거 같았다. 많이 늙었다 싶다.

 

아직도 (우리 집에서)모은 돈 얼마를 쥐고 있는듯 한데, 이들이 며느리가 몇 십만원씩 꿔 가고 모른 척한다고 한다. 옥탑방은 아주 덥다고 하더니, 문 열어 놓으면 괜찬여 하고 말을돌린다. 겨울에 춥죠 하니 불 때면 괜찮여 한다. 아들 내외 손자 손녀가 아래 층에 살고 있는데 할머니는 혼자 밥 끓여 먹는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 나간 뒤 용돈 벌이 하느라고 노인정에서 점심상 차리는 알바를 했었는데 손목이 시리고 행주를 짤 수 없어 그만두었다고 한다. 참 불쌍한 노인네다.

 

니들이 잘 먹든 그거 느른한거(치즈가 확실!) 찍 늘어지는 거 그거 먹자고 해서 피자집에 갔다.  먹던 거 밀어 놓고 새 조각 입에 대는 거 손과 입의 번잡한 움직임이 여적 편히 밥먹는 입장이 아닌 거 같았다.

저녁 상은 그나마 앉아서 내가 차려 주는 밥을 받아 먹으니 내 마음이 편했지만 그 마저도 급히, 아직도 먹고 얼른 일어나야 되는 입장인듯 서둘러 먹는 것을 보니 다시금 마음이 불편했다. 할머니가 여태까지 내 자식 남의 자식에게 노력 봉사하고 살았는데 누구도 할머니 인생의 당당함을 대접하지 않다니.

 

할머니는 스믈 두살에 한 동네 초등학교 동창과 혼인 하였는데 625가 났고 그 때 남편이 죽었다. 애 뱃는 지도 모르고 초상을 치루었다. 할머닌 그 때 왜 손도 못 잡고 젖도 못 만치고 안지도 않고 갔는지, 그거가 너무 억울해요 다정하게 살다가 갔으면 안 억을할 것인디 한다. 아들 하나 낳고 혼자 된 며느리 불쌍하다고 데리고 자던 시어머니 수발 들고 먼저 세상 떠난 동서 아이들 (수많은 조카들 !) 키우고 나와서 친정 오빠네서 인색한 올케 시집살이도 했고 빈 손으로 독립아닌 독립하려고 성남으로 아들 데리고 올라왔다. 친정이 서산서 부자로 사는데 유복자 아들 장가 갈 때 흰 와이샤쓰 한 장 해 주더라고 했다. 옛날에 다 들은 이야기 인데 또 들어도 그 집 식구가 참 박한 사람들이다 싶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니 할머니는 돌아갈 길을 걱정한다. 큰 놈을 보고 가야 하는데, 큰 놈만 들어오면 성남까지 모시기도 할 것인데.

자고 가세요 하니 난데없이 가스 불을 잘 껐는지 몰러 하며 자꾸 양산을 집어든다. 6호선 2호선 8호선을 자꾸 왼다. 갈아탈 노선들이다. 택시로 2호선까지 가서 지하철 탑승구 앞에서 헤어졌다.

 

내가 할머니 만나서 젊은 날 아이들 맏기고 일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세상에 착하고 누구와도 어긋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아이들 다 키우도록 식구 누구와도 목소리 크게 낸 적이 없다.

 

며칠 전에 큰 애는 엄마는 엄마 같지 않고 멘토 같고 컨설턴트 같고 우리 할머니가 엄마 같다고. 우리 엄마는 나를 이만큼 만들어 준 엄마이고 우리 할머니는 밥 챙겨준 엄마라고 하더군.

내 인생의 한 기둥을 내 대신 들어 준 할머니, 할머니 덕분에 행복했어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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