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11 02:26
어렸을 때, 한식, 추석때 성묘가는 것은 우리 형제, 사촌들에게 큰 소풍이였다. 시내를 통과하여 무악재, 갈현동 언덕지나면 좌우 길 모습이 내 사는사는 동네와 다르고 구파발을 지나면서는 논 밭이 펼쳐져 좋은 계절에 가족 나들이 나선듯 들떴다. 삼송리에서 좌회전을 하면 한적한 농촌이 푸근했고 추석때 일기가 좀 차가우면 어쩐지 돌아오는 길에 어린 마음이 멜랑꼴리해지기도 했다. 서울내기에게 있지도 않은 고향에 다니러 오가는 기분일까.
선산은 삼송리에서 일산가는 큰 길 우측 어디선가에서 부터 농협(농업)대학 앞 까지이다. 큰 길에서 오른 쪽으로쪽으로 좀 들어 올라가면 제법 큰 기와집이 있었는데, 선산 산지기 집이었다. 시제때시제때 그 집에서는 떡과 과일등을 준비해놓고 아버지 형제들과 내 사촌들을 맞았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큰 줄기였고 아버지는 장남이었다. 박경리 토지에 나오는 최서희네 집에서 보임직한 대접을 아버지에게 하였는데, 마당에 큰 멍석위에 그 해의 소출이 마르고 있었고 뭔지모르게 푸짐하고 대접받는 느낌이었다.
한 겨울에 그곳을 왜 가게 되었는지.....돌아오는 길에 동네아이들이 논에 물을 부어 만든 빙판에서 썰매타는 것을 부러워하며 보았던 기억이 난다. 길 따라 동네에 집이 조금씩 들어서고 큰 길에서 농업대학 들어가는 삼거리에는 키 작은 구멍가게도 생겼다. 널판지로 길게 만든 의자에 앉아 간간이 오는 버스를 기다리기도 했다. 엄마가 굵은 털실로 짠 스웨터 정도를 입고 있었는지 바람이 쌩하고 불면 살 속으로 냉기를 느꼈었다.
선산은 과수가 심어진 낮은 구릉과 그 사이 밭, 좀 언덕진 곳에 산소들...해서 평화롭고 아늑하였다. 남서쪽으로 낮고 열려있어 그곳에 걸친 석양은 아름다웠다. 여름에 그 곳에 가면 복숭아가 지천이었다. 복숭아나무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 매달린 모양이 친근했던것, 큰 함지에 벌레먹고 못생긴 복숭아가 가득 담겼고 도랑에는 그만도 못한 복숭아가 썩고 있었고, 누군지 모르겠는 아저씨가 좋지않은 낯색을 하고 잇었던 것이 기억난다. 몇 해 지나지 않아 그 복숭아 나무 모두 베어버리고 다른 것을 심었다던가.... 밤나무가 많았는데, 애쓰고 까보면 알이 작아 실망했던 것. 한 톨을 까면 그 안에 작은 톨이 들어있어서 누구가 더 작은 톨 많이 들어있는 밤을 찿는가 사촌들과 내기하던 기억.
몇 년이 지나면서 큰길에서 우측으로 돌면서 농협대학농협대학 들어가는 길 양쪽으로 집들이 들어섰다. 어릴 때 크게 보였던 산지기네 기와집은기와집은 조금씩 작아져 보였다.
지나가는 이야기로, 동네 땅값이 많이 올라 농사지어먹으라고 준 땅으로 산지기가 누구보다 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산지기 아저씨는 죽고 그 아들간에 땅 싸움 났었다고 하고, 조각내어 팔아먹었다고 집안 어른들이 모여서 장차 이일을 대체 어이할 꼬~ 하고 회의하였다고 한다.
오래된 기와집은 물론이고 나중에 들어선 집들도 모두 헐리고 흔적만 남아있다. 가을에 산소찿아 올라가는 길에 있던 그 동네 집들. 마당이 넘쳐 길위에 뭔가 펼쳐놓고 말리던 멍석, 누렁이들, 좀 살게된 서울 자식들, 친척들이 몰고와 자랑스레 대문앞에 세워진 브리사나 포니같은 차들....평소보다 달뜬 목소리로 차 트렁크에 분홍 나이롱 보자기에 싼 추석 선물 넣으라는 소리....인사나누는 소리.... 그 시절의 행복을 자랑하는 모습이다.
추억은 그렇고, 동네는 깡그리 털렸다. 높은 언덕은 남기겠지만, 낮은 언덕은 밀어 내고 아파트 빌딩을 올린단다. 그 동네동네 프로젝트가 고양 원흥 보금자리 주택이라고 한다. 그 동네에 대한대한 많은 기억은 부르도자가 밀어붙이는 흙속에 함께 묻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