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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녹였어요

아침에 아래층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때 전화 못 받고 두어 시간 후에 전화 걸었다. 온수가 안나오기에 우선 내게 전화했다면서 급해서 사람을 불러 처리했다고 한다. 잠깐 파이프를 녹였을 뿐인데 큰 돈을 요구하더란다. 십 년을 살도록 옥내에 있는 보일러 배관이 언 적이 없었는데, 올 겨울, 유난히 춥긴 춥다.

할머니는 "하필이면 오늘 세탁기도 고장 났어요. 빨래가 다 되었을 줄 알고 열었는데, 그냥 물이 고대로 있어요. 탈수가 안 되요."한다. 나는 할머니, 세탁기 고장난 게 아닐 겁니다. 배수 파이프에 고인 물이 얼어 안나가니 온수로 녹이거나 날 풀리면 돌아갈 겁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아 그런 건가요, 날 풀릴 때까지 빨래를 미뤄야 되겠군요 한다.  배관이 얼어서 온수가 안 나오는 거니 그 부분을 싸매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하는 거냐고 묻기에 테레비에서 계량기 얼까 봐 옷가지 넣어두는 대로 하면 된다고 했더니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고 한다. 내가 내려가 보겠다고 했다.

마른 걸레 몇 개를 들고 내려갔다. 일주일 동안 온수를 안 썼다고 했다. 많이 얼어있었던 듯 파이프에 습기가 맺혔다. 할머니에게 이건 냉수 올라가는 거고요, 이건 온수 내려가는 거고요, 이건 난방입니다...물기 닦아내고 걸레로 파이프를 감싸면서 설명하니 할머니는 난 그런 거 몰라요...어찌 그리 잘 알아요...한다. 기술자는 하루 종일 온수를 틀어 놓으라는데, 그래야 할까요 하고 묻는다. 그 기술자, 참 쉽고 비싼 방법을 권했구나 싶다. 젖었던 파이프는 습기가 맺힌 건지 다른 이상이 생긴 건지 확인해야한다. 기다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는 오랜 세월 대학교수를 했고 고위 공무원을 지냈다. 지금은 소득이 없다고 한다. 연금 받으시잖아요? 하고 물으니, 연한이 안돼서 못 준다고 했다 한다. 몇 년을 하셨는데요 하니 대학에 30년 있었다고 한다. 그럼 퇴직금은 받으셨네요 하니 그건 받았지요. 그런데 뭔가가 연한이 안된다고 해요 한다. 그건 연금인데요, 연금은 88년에 가입하고 몇 년이상 냈으면 일시불로 정산을 했거나 했을 텐데요 하니 자신이 언제 가입했는지 모른다고 한다. 국민연금은 1988년에 시작했고요...하니 전부 다 그 때 시작했나요? 묻는다. 일정이상의 규모는 고용주는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지요, 그 때 대학에 계셨거나 공무원이셨으니 그 때 가입되었겠지요 하니 글쎄요...연금 그런 거, 난 잘 모르겠네요 한다. 

월급을 받는 사람들 대부분은 연금의 기술적 운영을 몰라도 자신의 가입연도, 수급 시점은 알고 있다. 좀 더 관심이 있으면 시작 시점, 수급 조건, 수급 대상, 예상 금액 등은 알고 있다고 생각된다. 할머니는 교수였고 인구의 반인 여성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부처의 장이었다. 여성 관련 연구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오랜 동안 급여를 받는 입장이었으면서 자신이 수급자가 아닌 이유를 잘 모른다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관심 밖이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복지 정책 부처의 장이면 연금, 건강보험 등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 시스템의 개요는 알고 있아야 한다는 건 나만의 생각인가?

어떤 고위직 인사들은 인터뷰, 청문회에서의 답변으로 자신의 바닥을 드러낸다. 맡고있는, 맡으려고 하는 자리는 총리, 장관급인데, 기본 철학이나 부처 관련 지식이 부재하고 초라한 경우는 물론이고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정책에 대해 무지한 경우를 많이 본다. 본인이 모르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리와 자리의 권위로 미루어 그가 알고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는 더욱 더 모르고 있는 것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요즘이야 알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알 수 있고 아는 게 책임의 시작인데,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럴 생각이 없는 건지 그럴 필요를 못느끼는 건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할머니는 과거 동료였던 이들이 치매가 되었거나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한다. 내 어머니도 치매라 하니 증세와 치매가 얼마나 되었는지 묻는다. 요양 병원에 계시다 하니 그곳 환경, 생활은 어떤지 자세히 묻는다. 한 방에 몇명인지 식당으로 가서 배식을 받아야 하는지 의사는 항시 있는지... 남다른 사회적 이력을 가졌던 자신과 요양 병원 무명의 노인네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 보는 듯 잠깐 표정이 굳는다.  검소하고 단정하고 고상한 할머니는 새로운 사람과 얼굴을 트고 사는 이야기 나누기 어려워 보인다. 가끔 들러 차나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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