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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오래된 사진

오빠 생일 저녁 자리에서 조카가 오래 된 사진을 준다.
증조부 삼형제 사진과 할아버지의 황성 기독 청년회 학관 중학과 제3회 졸업생 기념 사진이다.  삼형제 사진 뒤로 보이는 잘 생긴 소나무와 저택의 지붕이 보이는 장소는 짐작되지만 확인은 안돼었다.
 

앞의 세 분 삼형제 중 누군가의 승진(?)기념 사진이 아닐까 싶다. 맏 형은 전주감영 府尹(관찰사와 동격)을, 둘 째는 고종 11년 1874년 부터 벼슬을 시작,  형조판서, 전라 감찰사를 지냈다. 막내는 고종 말, 牧使 등 정3품 통정대부를 지냈다. 상을 받기도 했고 윗 자리로 加資되기도 했고 지역민의 원성으로 遠惡한 지역으로 발령나기도 했다.  증조부가 지역민의 원성을 받았다는 기록을 읽으니 매우 부끄럽다. 조선 말, 고종 중후기 나라는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감사 시스템이 돌고 인사권자가 감사 내용대로 상벌 행정했다고 보아야 할까.  증조부들에 대한 기록이 조선왕조 실록에 나온다. 1905년 까지 人事 기록이 있으나 그 이후는 없다. 1905년은 을사늑약이 있었던 해.  위의 사진을 언제 찍었다는 기록이 없어 아쉽다. 나 혼자 1890 년대에 찍은 것으로 추측한다. 사진은 유니온잭, 일장기, 성조기, 십자기(스위스 국기?)등 만국기를 새긴 사진틀에 끼워져 있다. 그 시절 국기 모양이 달랐던 건지 디자인이 정확하지 않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조선 말기 액자 디자인 어설픈 만국기라는 점이....여러 추측을 하게 한다.  

 

할아버지 졸업사진이다. 황성기독교 청년회는 1903년에 세워진 YMCA의 전신이다. 1906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이 설치되었고 사진은 3회졸업기념이니 1909년-1910년에 찍은 것이라 보인다. 증조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민족과 사회교육을 시키려 했던 것일까? 졸업 사진 인물 중 한명이 벽초 홍명희라 한다. 윗줄 왼쪽 끝의 준수한 청년이 할아버지다. 원본 사진을 보니그 얼굴에서 아버지 젊었을 때 얼굴이 보인다. 그 얼굴에 머리를 양갈래로 땋으면 여고시절 단체 사진 속 내 모습같기도 하다.  

사진 속 젊은이들 얼굴은 모두 단단한 표정에 무게감이 있다. 청년들 몇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감과 결의를 드러내는 것같다. 할아버지는 장학사업에 재산을 많이 넣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장학회에 제공한 기숙사 - 방이 많은 큰 기와집이었는데 -에서 젊은이들과 가까이 지냈다. 내 국민학교 1960년 무렵  할아버지에게 놀러가면  많은 대학생 오빠들이 마당에서 아령같은 운동을 하고 있기도 했고 길게 잇대어 있는 방 앞 툇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기도 했다. 그 곳에서 나오는 큰 길에서 419와 516을 목격했다. 516이 아닐까 싶은데 아마도 6시 이후 통행을 금지 시켰다고 나가지 말라고 했고 어둡기 시작하면서 길이 텅 비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바둑을 두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할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에게도 바둑을 가르쳤다. 노년에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워 진 할아버지는 예전처럼 많은 학생들을 먹이고 재울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기숙사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학생오빠들이 많이 줄었고 기숙사는 많이 쇄락해서 운동하던 마당에는 잡초가 삐죽 삐죽 했고 길게 이어진 건물의 끝방들은 닫혔거나 툇마루가 비에 삭은 듯 했다.

황성 기독교 청년회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보았다.

오늘날 서울기독교청년회의 전신으로 5개국 출신의 37명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초대회장에는 헐버트(Hulbert, H. B.)가 선임되었다. 1901년 9월에는 질레트(Gillett)가 창설간사로 국제위원회로부터 한국에 파송되었고 이듬해에는 세계학생기독교연맹에 가입하였으며 1903년 10월 28일에 황성기독교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이때 선출된 12명의 이사 가운데에는 한국인으로 여병현(呂炳鉉)과 김필수(金弼秀)가 있었으며 1904년에는 이상재(李商在)·김정식(金貞植)·이원긍(李源兢) 등과 같은 고관출신의 지식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뒤 이들은 이 단체의 중추적인 소임을 담당하였다.

3. 활동사항

창립초기부터 연설회와 토론회를 운영하였으며, 1906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학관(皇城基督敎靑年學館)을 설치하고 운동회·사경회(査經會)·환등회(幻燈會)와 같은 사업도 실시하였다. 황성기독교청년학관은 중학과·일어과·영어과·목공과(木工課) 등을 설치하여 종교활동뿐 아니라 교육활동에도 힘썼다. 초기에는 옛 태화궁(太華宮 : 인사동 소재) 터에 회관을 마련하였으나 곧 1907년부터 종로에 회관을 신축하여, 1908년 12월 3일에 개관식을 가졌다. 이 단체는 사사부(司事部 : 이사회)를 비롯하여 의사부(議事部)·재정부·종교부·교육부·친접부(親接部)·운동부·교사부 등의 각종 위원회로 조직되어 있었다. 1906년에는 김정식이 동경에서 조만식(曺晩植) 등의 주도로 결성된 재일본조선기독교청년회의 총무로 파송되었으며, 1907년 4월에는 동경에서 개최된 세계학생기독교연맹 세계대회에 윤치호·김정식·김규식 등이 참가하였다. 이승만(李承晩)이 1910년말부터 학생부 간사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이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청년회의 활동도 일제의 직접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11년에 일제가 날조한 소위 '데라우치총독암살미수사건'으로 윤치호가 체포되었으며, 이 사건을 세계에 폭로한 질레트는 추방을 당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1913년초에 김린·사일환(史一煥)·유일선(柳一宣) 등 친일기독교인들을 매수, 유신회(維新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게 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일본YMCA에 소속시키는 공작을 벌였다. 그 결과 황성기독교청년회는 1913년 4월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약간의 자주성이 유지되었으나 일본YMCA의 산하에 놓이게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많은 활동을 전개하여 현대 스포츠와 기술교육, 사진·환등의 보급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와 같이 1900년대에 국권회복을 지향한 기독교 청년단체와는 달리, 국민계몽과 종교활동에 치우쳐 국권회복에는 소극적이었다는 것이 한계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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