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사거리 오피스텔 관리실 앞을 늘 지키던 개가 겨우내 안보였다.
얼마 전 멀쩡하던 개가 지난 늦가을 뒷다리를 끌며 관리아저씨를 따라 다니기에 왜 저렇거 되었냐고 물었더니
차에 골반과 다리가 부러져 수술했고 이제 다리에 힘이 생겨 일어서려는 중이라고 했다.
아저씨는 "저 놈 이제 나이도 많고 해서 죽으려나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수술 시키니 어찌 어찌 회복 되나 봅니다. 지가 자꾸 일어서려고 힘을 주네요" 했다.
엊그제 지나가다가 관리아저씨를 만났다.
강아지가 안보이네요.
...갔어요....
그래요? 저 번에는 다리 끌고 돌아다니더니...
힘 들었나 봐요. 결국 회복을 못하네요. 수술하고 고생했는데...
보내셨어요?
아뇨, 지가 갔어요. 나이도 많아요. 열 두살. 눈 도 안보이고.
아저씨 목소리가 변했다. 잠깐 말을 멈추더니,
가고 나니까 후회가 되네요....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어 조용히 아저씨 손에 든 빗자루와 쓰레받기만 쳐다보았다.
더 잘해줄 걸 그랬어요. 잘 해 준것도 없는데....그 놈 말을 내가 얼마나 알아들었을까...
아저씨는 입구 관리실에, 강아지는 늘 그 옆을 지켰으니 둘은 아마 가족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을 것이다.
내가 새 강아지 키우세요. 하니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아녜요, 그 놈 잊혀지지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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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몇 년전에 시골로 들어가 흙집을 짓고 산다. 개 집도 흙으로 지었다. 이렇게 저렇게 만난 복 많은 개 세 마리와 동거한다. 자신이 개의 무수리가 되었다고 하지만 피차 기대고 살고 있다.
그의 이웃에는 서울 사람이 지어놓고 살지 않는 집이 있는데 한 달에 한 번 오거나 말거나 한다고 한다. 그 집에
개 두 마리가 있는데 굶고 지내는 탓인지 이웃집 닭을 해치기도 했단다. 주인이 이웃에게 사과 한마디 안했지만 그가 개 밥 주러 가 보니 한 마리는 만삭이었고 한마리는 다쳐 있었다고 한다. 무심한 주인과 대면하면 자기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올까봐 주인 없는 시간을 봐서 사료를 챙겨 주었다고 한다. 쌩쌩 추운 이 겨울, 산 날이 가까워 가보니 어미 개는 새끼 여섯 마리를 낳고 죽어있어 파 묻고 새끼들 깔개를 깔아 주고 돌아왔는데, 며칠 후 가 보니 새끼들이 없어져 옆 집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주인왈 팔 수도 없게 겨울에 새끼 낳았다고 하며 차 태워 갔다고 한다. 자신이 자주 돌보지 못해 어미개가 저 세상으로 가게 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하루 저녁 지나면 마실 물도 꽁꽁 얼어버리는 이 번 겨울, 한 마리 남은 숫놈이 걱정되어 보온병에 따뜻한 물, 사료, 간식을 챙겨 매일 눈 길을 걸어 출퇴근 하고 있다고...
그 동네는 산이 깊어 눈이 많이 온다. 눈이 쌓이면 산에 사는 이웃들 먹을 것이 귀해진다. 그는 배 곯을 새들을 위하여 여기 저기 나무 가지 에 돼지 비계를 걸어놓는다. 계속되는 영하의 날씨에 비계는 북어처럼 얼며 마르며 새들의 영양 보충 먹거리 겸 놀이터가 된다. 그는 새들이 비계를 쪼며 노는 모습을 보며 평화로운 시간을 즐긴다 한다. 그 순간을 찍은 사진 몇 장을 구경하였는데, 지지배배 톡톡톡 소리가 들리는 듯.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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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모였을 때 어쩌다 개 기르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개는 똥개가 맛있지 집 강아지는 먹을 게 없어 또는 사람에게 잘하지 뭐하러 개에게 신경쓰냐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그 말에는 개는 하잖은 존재이고 사람에게 소비될 대상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보호소에 가득한 주인 잃은 개가 며칠 지나면 안락사되니, 하잖은 존재이기는 하다. 그러나 개, 소, 돼지를 단순히 사육, 소비 대상으로 보는 것은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이고 개 목숨은 사람 손에 달렸으니 마음대로 처분해도 된다는 생명에 대한 폭력적 사고방식이다.
새끼 핥고 젖 물리고 보호하는 어미와 새끼 사이의 유대는 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생명에 애착과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까이 키우는 사람은 개, 소, 말 등의 탄생과 죽음에 기쁨과 슬픔을 같이한다. 소 시장에서 젖 떼지 않은 새끼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어미 소, 죽은 새끼 옆을 눈물 흘리며 지키는 어미 소의 마음은 어미이고 자식인 우리의 마음까지 전해온다. 파리채로 파리를 잡고 바퀴벌레 잡으며 슬퍼하지 않지만 개, 소의 상처와 고통에 사람들은 공감한다. 사람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공감하면 마음이 가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다.
개는 사람에게 의지하지만 곁을 지키고 사람과 교감하는 독립된 생명이다. 다른 먹거리를 선택할 수 있는 세상에 교감하던 존재를 먹거리로 취하겠는가. 어쩌다 내게 온 생명을 거두고 사랑을 주고 받고 함께 즐기면 사람에게 소홀해 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개가 인간에게 가야 할 것을 축내고, 사람과 동물은 마이너스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실은 사람이 개, 소, 말에 의지하고 그 생명들이 사람 살이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데.
집 베란다에서 자라는 나무와 화초 몇 개는 동네에서 버려진 것을 줏어온 거다. 홍대 거리의 장식용 화분은 물을 못 먹어 바싹 말라있기도 하고 화분째 버려지기도 한다. 부분 살아있고 부분 말라있는 화분에 물을 주면 며칠 뒤 잎이 반짝이며 살아난다. 그것도 생명인데 거두자 하는 생각이 들어 목 말라 하는 화분을 끌고와 다듬고 보살피면 다음 해 멀쩡하게 잎을 내고 꽃을 피우기도 한다. 그 중 몇은 잘 커서 분가를 시키기도 했다. 이 노력에, 남의 거에 뭔 상관, 사람에게나 잘하지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말에는 먹고 살기 바쁜데 개가 굶거나 아프거나 나무가 말라죽는 거 뭔 상관이냐 하는 생각이 있지 싶다. 또는 사람이 개와 화분과 거리의 흙에 뿌리박고 자라는 花木과 무관한 존재라는 생각이 있지 싶다. 거리와 공원의 나무잎이 무성하면 새도 다람쥐도 모이는데, 우리 손이 닿는 곳에서 시들어 가는 나무와 풀과 동물을 거두는 것이 도시에서 사는 사람의 일상 속 소박한 수고인데. 그게 사람에게 잘하는 것 아닌가. 사대강 삽질에 생명이 죽어가는 고통을 제 몸처럼 느끼고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삽질을 저지하려고 목숨을 거는 것에 대해 남의 거에 뭔 상관, 사람에게나 잘하지 생각할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