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29 00:38
포스터가 멋지고 선전 문구도 멋져서 보았다 .
마케팅 도구의 왕거품을 보고나니 영화를 흉보고 싶다.
회색하늘, 죽음뿐인 황폐한 땅, 무너진 건물들은 문명이 사라진 대재앙 후의 지구모습을 사실처럼 보여준다. 낡고 때에 절은 옷, 더러운 손톱, 앙상하게 말라가는 아버지는 파괴된 자연과 사회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회색 길 위에 내던져진 삶의 표현이다. 그게 영화 전부다. 에피소드, 등장인물 성격(성격이랄 게 나타나지 않음)과 행동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 때와 먼지에 절어 계속 걸을 뿐 이야기도 긴장도 재미도 의미도 없다. 상투적인 선량한 아버지의 승리, 유치원 어린이 수준의 선악 나누기의 앙상한 뼈대로 2시간을시간을 끌어간다..
비고 모르텐슨은 이어지는 공포와 긴장 속에 아들을 보호하며 소진되는 생명을 진지하게 보여준다. 내가 낸 영화 값의 반 이상은 그의 몫이다..
마주치는 인간들을 父子는 착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나눈다. 누구나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마주하는 극한 상황인데, 무너진 과거 문명사회의 잣대로, 선 또는 악으로 그들을 판단한다. 내적 외적 상황과 갈등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사람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물음이나 이해는 없다.
굶주리며 길을 간다. 희망의 기미는 없다. 어린 아들은 언제 도착하느냐고 거기는 따뜻하고 먹을 거 있는가 묻고 보챌만 하고 아버지에게 포기, 갈등을 일으킬 만 한데 그러지 않는다. 아버지의 남쪽에 대한 기대와 걷기는 고민도 의심도 드러내지 않았다. 재앙 이후에 태어난 아들이 피난길에 동물 봉제 완구를 안고 자고 디노사우르스 고무 장난감들을 배낭에 지고 다니는 설정은 감독의 상황에 따른 인간대응에 대한 무지와 헐리우드영화 속의 전형적인 순진한 소년의 합성이다. 아들은 고난의 이동 내내 통통하고 예쁘다. 마른 아이를 아들 역에 썼으면 연기 효과가 올라갔을 것이다.
인육을 먹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첫 등장에 - 복면에 마스크- 친절하게 악인인줄 알아보게 입혀놨다. 여럿이 총 들고 트럭 타고 몰려다닌다. 멀쩡한 가옥에 살며 옷도 갈아입는다. 물, 가스, 전기가 끊어진 상황과 동떨어져있다. 사실감이 확 떨어진다. 사람을 사냥하러 다니는 비인간 수준으로 표현된다. 서로간에 , 각자 마음 속에 의심과 기피가 팽팽할 사람들끼리 모여서 함께 산다고?. 아동용 만화 같은 상상이다. 인육을 취한 배경, 그들 사이의 있을 수 있는 갈등과 긴장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영화 속 시선은 문명, 사회가 붕괴되고 윤리가 사라진 종말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존재에 대한 욕망 앞에 인육이냐 굶어 죽을 것인가 하는 불가피한 선택을 교조적 시선으로 악으로 판정한다 .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슴속에 불씨를 피워 건네주라고 한다. 불씨의 의미는 불분명하고 그나마 의미를 이야기에 녹이지 못하고 주인공의 입으로 표현한다. 살아있기가 죽음보다 힘들고 사는 의미 없어 아내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뒤로하고 죽음을 택해 집 밖으로 걸어나갔다. 하루 하루 존재를 이어나가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인데 어떻게 불씨를 유지할 것이며 누구에게 불씨를 이을 것인가? 답을 찿는 고민이 없으니 "고난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고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동의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이입 과정이 없다.'인간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도 '착하게 살자'표어 수준으로 단순하고 막연한데, 거룩하고 심각한 폼 잡고 반복한다.
불꽃과 선함을 말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보호하려다가 권총으로 살인을 하게 된다. 비상 식량을 훔쳐간 행인을 잡아잡아 총으로 위협하며 추위 속에 얼어죽을 줄 알지만 옷과 신발까지 홀랑 벗긴다. 아들 때문에 살인하고 내 것을 잃은 분노 때문에 같은 상황에 놓인 행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것은 정당한가? 인육을 먹으며 살아남은 자들과 내 것을 지키려는지키려는 살인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악이고 이것은 의로운가? 영화는 이중잣대에 대한 조명은 커녕 이중 잣대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가 죽고 혼자 남은 소년에게 낯 선 남자가 나타나 길을 함께 가자고 한다. 그는 아내와 아이 둘과 큰 개를 이끌고 있다. 선량한 모습의 그의 아내는 아들에게 우리는 너의 아버지와 너를 지켜보고 따라왔어 라고 한다. 가족과 함께 있으면 선인가? 미국 영화 속 행복한 가정에 큰 개가 단골로 등장하지만 여기서 큰 개가 나오는나오는 건 피난 길에 봉제완구와 디노사우르스 모형 들고 다니는 것처럼 억지스럽고 사실성을 해害한다. 복선도 없이 가족이 쨘!등장하니 황당하고 새 가족과의 합류라는 손쉬운 마무리는 한심하다.
짧게 말해서 꽝이다. 이야기 구조도 구조를 채워야할 에피소드도 의미도 설득력도 재미도 모두 없으니.
못마땅한 영화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건,
1. 이 거룩한 주제에, 엄청난 의미가 있는데, 당신들 보면 감동할 거야, 하는 폼으로 무지하게 허세 잡기 때문이다. 전세계를 사로잡은 지구 마지막 사랑이라고 하는 등 거품이 센데, 거품이 세면 시간이 가서 거품이 저절로 사그라들기 전에 거품을 터트리고 싶기 때문이다.
2. 영화가 보여주는 단순 무지, 교조적인 선악 나누기가 무섭기 때문이다.
3. 지리하고 재미없으면서 우울한 테마의 영화는 예술영화라고 생각하고 능동적으로 감동"당"하는 경우가 싫기 때문이다.
줄거리
지구에 대재앙이 오고 잿빛 하늘이 태양을 가리고 냉기 가득한 땅 위의 모든 생명체는 죽었다. 행복했던 주인공 부부에게 대재앙의 고통이 시작될 때 아들이 태어난다.
전기, 식량이 떨어지고 고통의 날이 계속된다 . 추위 속 텅 빈 이웃. 먹을 것이 떨어져 벌레라도 보면 집어먹는다. 삶이 죽음보다 고통스럽고 조그만 희망도 남아있지 않을 때 아내는 남편에게 삶을 마감하자고 한다. 아버지는 그 사이 소년으로 자란 아들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내는 죽음을 택하여 집 밖으로 나간다..
부자는 남쪽으로 길을 떠난다. 남쪽에 무엇이 있는지 따뜻한지 모른다. 도시는 태양도 얼은 듯 회색 하늘아래 녹슨 차, 부서지고 빈 건물 뿐 살아있는 것은 없다. 죽은 나무들로 덮인 산을 걷고 물을 건넌다 .
갑자기 한 떼의 총 든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사람을 먹고 버티는 사람들이다 . 총 든 거친 사내들이 부자를 쫓는다. 위기를 모면한다. 아들은 묻는다. 그들은 나쁜 사람이냐고. 아버지는 우리는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가슴에 불씨를 지니고 전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폐허가 된 마을을 지나고 텅 빈 슈퍼마켓을 지나고 들판을 지난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집을 발견한다. 근래에 사용된듯한 바베큐 석쇠 , 더러운 냄비. 고기를 거는 정육점 고리가 보인다 . 핏기가 느껴진다. 지하실로 내려간다. 굳게 닫힌 문을 여니 맨 몸에 피 흘리고 공포에 떨며 살려달라고 비명 지르는 사람들이 갇혀있다. 식인 자들이 돌아와 .부자를 찾는다. 가까스로 벗어난다.
부자는 닳은 지도에 의지하여 남쪽으로 계속 걷는다. 황량한 풍경이 계속된다. 어디서도 희망의 꼬투리는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럼에도 선함과 가슴속의 불씨를 이야기한다.
발견한 저장식량을 수레에 끌고 자다가 도둑 맞는다 . 아버지는 그를 쫓는다. 음식을 훔쳐간 자를 위협하여 되돌려 받고 그를 홀랑 벗긴다. 그가 얼어 죽을 것을 아들은 걱정하나 아버지는 옷을 돌려주지 않는다.
아버지는 길 위에서 숨을 거둔다. 혼자 남은 아들은 우연히 한 가족을 만난다. 부모와 아이 둘과 개 한 마리. 그들과 동행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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