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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생활

나도 깔때기 좀


작년 5월에 soaf에서 그림 구경을 하는데 몇 작가가 눈에 띄었다. 구십 몇 화랑이 참여했으니 몇천의 작품이 전시되었을거다. 큰 전시회, 기사 등으로 이름이 알려진 작가 이외에는 특별히 아는 이름이 없는 가운데 작품만 보는 거다. 블라인드 테이스팅, 아니지 마시는 거 아니지. 설렁 설렁 보다가 좋게 기억 남는 작품이 있다. 다시 보고 싶으면 그 전시칸으로 가서 다시 보고 ~ 다시 봤는데 아니다 싶으면 그 뿐이고. 그 중 눈에 띄는 것들을 사진 찍었다.  그 중 한가지가 이 그림들이다. 
그림은 쉽고 가볍다. 동글동글한 얼굴과 몸의 선은 단순하고 유연하고 사랑스럽다. 밝고 명랑하고 행복한 가족, 연인 사이 사랑, 꽃, 꿈, 행복, 기대, 그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가족, 연인과의 일상에서 달콤한 시간이 주 소재다. 가벼움은 이야기 책 속의 삽화로도 적당해보인다. 



교보생명에서 보낸 탁상용 달력을 이제사 뜯었는데, 반가워라. 열 두달이 이 작가의 작품으로 채워져있다.
아, 내가 그림 보는 눈이 있다니까. 달력에 이름이 있어 보니 Eva Armisen, 스페인 출신이다.


대학 일학년 때, 그림 공부하던 선배가 구경하러 가자 했다. 인사동 수도약국 사거리서 서쪽 방향에 있던
문 화랑 (기억이...). 고등학교때 지바고, 사운드 오브 뮤직 그런 영화를 단체로 본 게 아마도 예술적 소양을 늘리는 유일한 외부 교육이었으니 화랑에서 그림 구경이라고는 생전 처음이었을 터. 화가 이름도 모르고 화랑 벽에 걸린 작은 그림들을 천천히 보았다. 장터의 아낙들, 동생 등에 업고 엄마를 마중하는 누이, 겨울 벗은 나무 아래 햇빛 받으며 앉았는 노인들, 고단한 중에 막연한 기다림, 번잡하지않아 한가한 그러나 쓸쓸한 시간, 겹겹이 두꺼운 칠, 고단한 노인들의 손끝같은 거칠은 표면, 흙, 땅, 모래. 찬찬이 보다가 내가 울고 있었다. 왜 그런지, 뭔 지 모르고 눈물이 흘러 화랑 벽 모퉁이에 얼굴을 향하고 이거 왜 이러지 하면서 가슴을 누그러뜨려 맨얼굴로 돌아왔다. 그게 박수근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이 십년쯤 지났을까, 충정로 호암미술관에서 박수근전이 있었다. 그 사이 여러 기회로 작품을 접했기에 처음 만났을 때의 핏줄이 땡기는 감동은 지났고, 왜 그 첫만남에 눈물이 났을까를 생각하며 한 점 한 점 보았다. 작품의 단층을 색층으로 색깔로 분석해 놓았던 것이 전시회의 특징이었는데,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80년대 중반, 제주도 파라다이스라고 아주 아주 예쁘고 개성있는 호텔이 있었다. 체크인 카운타에서 카드를 쓰는데 직원 어깨 너머로 보이는 그림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큰 화면에 다채롭고 화려한 꽃, 나비, 잠자리, 벌레, 나무잎, 새가 고밀도로 바로 앞에 있는 듯 어울려 있었다. 붉은 꽂 노랑나비 흰나비 빨간 부리새...화면에서 지지배배 소리났고 습기채고 서늘한 숲 속에 원시적인 생명이 굵고 빠른 붓질로 살아있었다. 화가의 이름을 그림 모퉁이에서 찾아냈다. 서울 와서 김종학 화가의 그림을 찾았다. 포스코 센타 엘리베이터 로비에 걸린 거 알고 보러갔다. 큰 화폭에 붉은 해 뜨는 설악 봉우리. 멀리서 보다가 가까이 가보려니 그 엘리베이터는 회장 전용이라 가까이 가면 안된다고 경비가 제지했다. (배타적 통제를 통해 권위를 확인시키는 촌스러움이라니.)


나에게는 김종학이 초면이었지만 그는 이미 이름이 상당히 알려진 화가였었다. 90년대 말 IMF가 휩슬던 시기에 한국경제신문 지상갤러리에 김종학그림 두 점이 나왔다. 연희동에 있는 화랑을 찾아가니 한 점은 김종학 특유의 색과 꽃을 보여주는 여름 설악, 한 점은 흰 눈 위에 흰 토끼를 그린 겨울 설악. 여름 설악은 350만원, 흰 설악은 300 만원. 여름 설악이 맘에 들었다. 흰 그림 값으로 여름 설악을 달라고 흥정했으나 거절당했다. 흥정했어야 했는데 할 줄 몰랐다.... 언제인지, 현대화랑에서 초대전. 갔더니 호사한 차림의 중년부인들로 화랑이 가득찼다. 부유한 여성들이 워너해브하는 작가인 듯 했다. 그림값은 훌쩍 뛰었다. 그림대신 달력을 사는 것으로 접고 왔다.


그의 그림을 간간이 만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색, 붓놀림, 크게 봐서 대상도 같았다. 외환위기에서 벗어나며 시장이 안정팽창한 이유도 있었고 시중 콜렉터들의 취향이 몰린 이유도 있었고 해서 볼 때마다 가격이 올라있었다.  내게는 김종학의 새 그림들도 늘 그 스타일이니 늘 같은 그림을 그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테마 그림을 그려내는데 그림 값 올라가는 속도가 불가해한 지경이 되었다. 이건 여인네들이 특정 상표 핸드백에  쏠리듯 몇몇 화가에게 관심과 욕망이 쏠린 결과 부풀어 오른 거품이다 싶었다. 30년 동안 내내 대상도 스타일도 같다고? 팔리니까 그린다고? 예술하면서 모험도 안 해봐? 피카소도 로댕도 마네도 평생을 보니 몇 번이고 새롭게 다가오는 것에 반응하고 새로운 대상과 기법을 모험하더라. 그러니까 대가라고 하지. 김종학은 그만한 나이 되도록 사는 데 철학적, 현실적 질문도 안생기나? 살다가 다른 흥미도 안생기나? 인생에 다가오는 것도 없었나? 그런 질문이 반복되고 나는 마음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제 그는 최초의 성공에 안주, 자기 예술 셰계 확장에 게으른 작가일 뿐이다, 그는 예술가가 아니라 스타일 있는 기술자다. 이건 마치 핸섬, 매력남이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어졌을 때, 그는 바람둥이일거야 라고 생각하고 접는 마음과 비슷했다. 그러면서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러나 한 번 데이트하고 나면 바닥을 보이는 외양만 핸섬한 사내는 싫어.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칭송받더라도 나에게는 새로운 작품을 시도하지 않는 기술자일 뿐이야. 끝. 그렇게 정했다. 

(그림 본 자랑으로 오늘 말이 기네. 그러게 깔때기라니까.)
(깔대기는 나꼼수에 나오는 정봉주의 깔때기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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