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사는 친구가 본격적인 스파게티를 해 주마고 오란다.
와인과 집에서 키운 방울 토마토를 들고 나서려는데 전화가 왔다.
너 혹시 바질 있니?
허브는 안키워서...어. 깻잎은 있는데, 그건 안되겠니?
야, 안어울려 ㅋㅋ 기냥 와...
친구는 가지를 깍둑 썰어 소금 뿌려 놓았고 피망, 토마토, 파프리카를 굽는다. 나는 훈수 둘 일 있으려니 하면서 친구 옆을 왔다리 갔다리 한다. 나도 한스파게티한다고 자부하지만, 가지 스파게티는 첨인데, 게다가 친구는 가지를 굽는다. 훈수둘 건덕지가 없다.
힘들게 왜 구워? 그냥 볶아 하니,
가만있어, 맛이 다르다고~ 한다. 거므스레 껍질이 탄 야채를 수도물에 식혀 껍질을 벗기고 작게 잘라 후라이판에 볶는다. 손이 많이 간다...가지도 물기 짜내어 볶고 이름만 들어 본 허브, 향신료를 척척 털어 넣는다. 국수도 시간 맞춰 삶아 내더니 버터 한 조각을 올려 놓고 흔들어 녹인다. 친구의 숙련된 솜씨에 나는 훈수는 커녕 그건 왜 넣어? 묻기나 하고... 조수된 마음으로 샐러드를 접시에 담는 사이 친구는 빵을 구워 낸다. 식탁은 멋지게 차려졌다. 구운 야채 풍미로 스파게티가 달다. 와인맛도 훌륭하다.
몇년 전 둘이 여행하던 이야기를 한다. 기억도 취향이다. 그녀는 우리가 먹었던 음식을 기억하고 나는 음식점과 거리를 기억한다. 새벽에 수영하고 저녁에 달리기하는 친구는 가라앉은 내 일상을 자극한다. 그래도 나는 움직이지 않지만. 그녀에게서 에너지가 넘어온다. 이야기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마음은 풀어지고 몸도 그랬다. 와인을 끝내고 뭘 더 마신 거 같다.
친구네 아파트를 나와 큰 길을 건너고 여름 밤거리, 천천히 집으로 걷던 시간도 좋았다.
내가 언제고 놀러와, 청했고 그랴 곧 갈게, 약속했지만 지방사는 친구는 서울 오면 시간을 쪼개 쓰느라 얼굴을 못 본다. 그 친구가 전화했다. 그 동네 갈 일이 있으니 집에 가도 되겠냐고. 공부 모임을 빠질 수 없어 서둘러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를 기다렸다.
오랜 만에 친구와 마주 앉으니 대화가 두서 없다. 가족 안부를 묻다가 눈 길 따라 창 밖에 저건 뭐야? 자리에 앉으며 이 소파가 전에 있던 건가? 끼어드는 철수를 밀며 몸은 건강하지? 운동 좀 하니?...차를 끓이고 과일을 씻으면서 묻고 답하는 박자를 늦춘다. 호흡을 다듬고 찻잔을 앞에 놓고 친구 얼굴을 본다. 가는 손가락, 마른 몸, 두꺼운 안경, 그 뒤로 영민한 눈 빛. 중학교 때 처음 봤을 때 그대로다. 친구는 그 때 자기는 의사가 되어 돈을 댈테니 너는 영화를 만들어라 했다. 그 나이에 뭔 약속을 못할까. 그러자고 했다. 친구는 약속을 지켰는데, 난... 아, 영화 만든다는 선배에게 투자했다가 날린 적 있구나.ㅎ
나는 마당에서 키운 토마도를 자랑한다. 친구는 '완전 친환경이네! 좋아!' 하며 접시를 비운다. 아이들 이야기 젊은이들 이야기 병원 이야기 교육 이야기 세상 이야기도 하고 노후 대책을 묻기도 한다. 남자가 늙으면 필요한 거 다섯가지, 마누라, 와이프, 아내, 집사람 또 뭐라더라, 여자가 늙으면 필요한 거 다섯가지 친구, 프렌드, 딸, 돈... 또 뭐라더라... 친구는 달콤한 이야기를 잘한다. 영화 뭐뭐를 (제목 잊었네) 너하고 보고 싶었어. 왜? 보고 너하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사랑 표현이다. 밖이 어두워 진다. 서향 창으로 노을이 보인다. 함께 바라 본다.
친구와 골목을 걸으며 음식점을 찾는다. 오전에 내린 비는 말랐고 공기는 삽상하다. 저녁 산책 나온 가벼운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한가한 식당 구석 자리를 찾아 가벼운 메뉴를 주문한다. 오래 된 부부의 익숙한 저녁 시간처럼. 저녁을 마친 친구는 약을 한웅큼 먹는다. 10년 넘게 주말마다 비행기로 지방을 오르내린 친구의 무릎은 아프고 눈은 어두워져 간다. 혈압이 낮고 기력은 부실하다. 고단하지만 성실성과 책임감으로 몸을 모른 척 해왔다.
너무 자기 몸을 한계로 밀어 붙이지 마. 몸 아끼고 시간을 즐겨 했더니
그래야 겠어. 거길 그만 두면 잃는 게 많을 거 같아서 못 그랬어. 한다.
나는 편안하게 권하고 친구는 편안하게 끄덕인다. 늘 그랬으면 싶은 편안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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