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18 - [잡담] - 우울증과 죽음
연일 젊은이들의 자살 뉴스가 들린다. 젊고 아름다운 아나운서도, 한때 최고의 사랑을 받던 가수도 프로 축구선수도, 중이염이 심해 죽도록 아파도 군부대 상관은 무시하고 군의관은 외면해 혼자 앓던 어린 군인도 있었다. 알려진 그들의 죽음보다 몇 배 많은 사람들이 홀로 생을 접고 가족 세상을 등졌다. 모든 미디어는 그들의 자살 이유를 우울증이라고 알렸다. 참으로 사회적으로 반성없는 간단하고 편리한 이유이고 사건(기사)처리이다.
그들이 죽음을 택하게 된 사연과 아픔을 남이 알 수 없다. 단지 그들이 모두 극복할 수 없어보이는 거대한 한계와 소외를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몇년 전 에스지워너비 sgwanabe는 여러 해 동안 최고의 가수였다. 노래는 아름다웠고 그들은 사랑 받았다. 그들 중 채동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만큼 낼 수 없는, 비중이 줄어든 존재라고 생각하고 구룹에서 빠져나와 솔로가수로 섰다. 요즈음의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조직화된 배경과 작업이 없으면 역량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이 없었던 그는 과거의 정점에서 내려왔고 새로운 지형에 뿌리를 내릴 자리를 만들지 못하였고 시간이 지나고 그는 조용히 잊혀졌다. 그와 그의 주변은 과거의 정점을 기대했고 지향했을 것이고 그것은 그에게 아득한 목표가 되었을 것이고 그를 주저 앉혔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에 따른 여러가지 위축이 소외를 불러 더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중이염 앓던 군인은 몸의 고통만큼 군대의 소외가 힘들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죽고 싶지 않으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고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그가 마주하였을 높고 굳은 벽은 어린 군인 탓이 아니다. 그것은 어린 군인의 고통을 엄살과 핑게로 규정한 군대의 살인이다.
젊고 아름다운 아나운서의 어리석은 사랑과 무지하고 폭력적인 상대 야구선수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그것은 개인적인 스토리로 옛날 상처로 접어 버리면 되는 거다. 임태훈이라는 야구선수의 친애를 가장한 폭력과 사기가 그녀 죽음의 일차적인 원인이었다면 임태훈 동료 선수들의 수근거림, 얕잡아 보고 치근덕거리는 시선은 후발적이지만 더 큰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특정의 직업을 가진 그녀가 이런 시선 속에 같은 직업을 이어가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직업은 가치에 있어 전존재에 가깝다. 그녀는 이것을 박탈 당했으며 그것은 존재의 박탈로 이어졌다. 수근거림과 더러운 시선을 보낸 임태훈과 주변 야구선수들의 致死이며 확대하면 야만적인 남성들의 무책임과 가벼움과 성을 소비거리로 보는 사고방식이 致死한 것과 같다. 그녀는 자신이 당한 폭력과 농락에 대하여 자기 홈피에 글을 올린 후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그 굴곡 속에서 그녀가 털어내고 싶으나 호소할 곳 없었음, 수용과 부정사이를 헤매었음을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지만 나는 그들은 타살당했다고 생각한다. 어린 군인의 고통과 존재를 타인이 규정했고 본인과 주변의 과거에 기초한 기대가 그의 존재를 근거했고 주변의 시선이 그녀에게 낙인을 찍었고 목숨을 던지게 했다. 그들의 죽음은 슬픔보다 그들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 내가 살고잇는 사회가 결핍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분노를 일게한다.
타인의 규정과 기대와 낙인에 고통받던 그들이 그것을 깨고 벗어나 그 때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까 생각해 본다. 너희들은 살아야하는 귀한 존재라고, 높고 두꺼운 담벼락에 고래고래 고함이라도 지르라고, 남이 악의로 찍은 낙인에 내가 정의되는 거 아니라고, 마음의 근육을 튼튼하게 키우면 낙인은 희미해진다고, 내 속의 평화를 방해하는 남의 기대는 벗어버리라고 가르쳤어야 했다고 생각해 본다. 사는 건 굴곡의 연속이라는 인식의 알약을 예방주사 맞히듯 먹이고 마음의 구속을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쳤어야 했다고, 어미된 입장에서 후회한다. 얘들아 그래도 살아야 돼.
연일 젊은이들의 자살 뉴스가 들린다. 젊고 아름다운 아나운서도, 한때 최고의 사랑을 받던 가수도 프로 축구선수도, 중이염이 심해 죽도록 아파도 군부대 상관은 무시하고 군의관은 외면해 혼자 앓던 어린 군인도 있었다. 알려진 그들의 죽음보다 몇 배 많은 사람들이 홀로 생을 접고 가족 세상을 등졌다. 모든 미디어는 그들의 자살 이유를 우울증이라고 알렸다. 참으로 사회적으로 반성없는 간단하고 편리한 이유이고 사건(기사)처리이다.
그들이 죽음을 택하게 된 사연과 아픔을 남이 알 수 없다. 단지 그들이 모두 극복할 수 없어보이는 거대한 한계와 소외를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몇년 전 에스지워너비 sgwanabe는 여러 해 동안 최고의 가수였다. 노래는 아름다웠고 그들은 사랑 받았다. 그들 중 채동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만큼 낼 수 없는, 비중이 줄어든 존재라고 생각하고 구룹에서 빠져나와 솔로가수로 섰다. 요즈음의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조직화된 배경과 작업이 없으면 역량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이 없었던 그는 과거의 정점에서 내려왔고 새로운 지형에 뿌리를 내릴 자리를 만들지 못하였고 시간이 지나고 그는 조용히 잊혀졌다. 그와 그의 주변은 과거의 정점을 기대했고 지향했을 것이고 그것은 그에게 아득한 목표가 되었을 것이고 그를 주저 앉혔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에 따른 여러가지 위축이 소외를 불러 더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중이염 앓던 군인은 몸의 고통만큼 군대의 소외가 힘들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죽고 싶지 않으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고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그가 마주하였을 높고 굳은 벽은 어린 군인 탓이 아니다. 그것은 어린 군인의 고통을 엄살과 핑게로 규정한 군대의 살인이다.
젊고 아름다운 아나운서의 어리석은 사랑과 무지하고 폭력적인 상대 야구선수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그것은 개인적인 스토리로 옛날 상처로 접어 버리면 되는 거다. 임태훈이라는 야구선수의 친애를 가장한 폭력과 사기가 그녀 죽음의 일차적인 원인이었다면 임태훈 동료 선수들의 수근거림, 얕잡아 보고 치근덕거리는 시선은 후발적이지만 더 큰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특정의 직업을 가진 그녀가 이런 시선 속에 같은 직업을 이어가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직업은 가치에 있어 전존재에 가깝다. 그녀는 이것을 박탈 당했으며 그것은 존재의 박탈로 이어졌다. 수근거림과 더러운 시선을 보낸 임태훈과 주변 야구선수들의 致死이며 확대하면 야만적인 남성들의 무책임과 가벼움과 성을 소비거리로 보는 사고방식이 致死한 것과 같다. 그녀는 자신이 당한 폭력과 농락에 대하여 자기 홈피에 글을 올린 후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그 굴곡 속에서 그녀가 털어내고 싶으나 호소할 곳 없었음, 수용과 부정사이를 헤매었음을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지만 나는 그들은 타살당했다고 생각한다. 어린 군인의 고통과 존재를 타인이 규정했고 본인과 주변의 과거에 기초한 기대가 그의 존재를 근거했고 주변의 시선이 그녀에게 낙인을 찍었고 목숨을 던지게 했다. 그들의 죽음은 슬픔보다 그들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 내가 살고잇는 사회가 결핍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분노를 일게한다.
타인의 규정과 기대와 낙인에 고통받던 그들이 그것을 깨고 벗어나 그 때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까 생각해 본다. 너희들은 살아야하는 귀한 존재라고, 높고 두꺼운 담벼락에 고래고래 고함이라도 지르라고, 남이 악의로 찍은 낙인에 내가 정의되는 거 아니라고, 마음의 근육을 튼튼하게 키우면 낙인은 희미해진다고, 내 속의 평화를 방해하는 남의 기대는 벗어버리라고 가르쳤어야 했다고 생각해 본다. 사는 건 굴곡의 연속이라는 인식의 알약을 예방주사 맞히듯 먹이고 마음의 구속을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쳤어야 했다고, 어미된 입장에서 후회한다. 얘들아 그래도 살아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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