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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닮은 역사

2010/01/23 22:40

1929년 미국 대공황 후.

미국은 하이인플레에션에 시달리는 독일에 '사회주의 혁명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위하여 전쟁 (1차 대전) 배상금을 탕감해주고 막대한 액수를 투자했다. 그러나 1929의 대공황으로 미국 자본의 뒷받침을 상실한 독일 경제는 송두리째 흔들리는 위기를 맞이했다. 임금 인하와 실업에 시달렸다. 이때 독일의 자본과 힛틀러의 나찌는 그들을 위한 그들의 방법을 선택했다. 조작되고 동조한 독일 국민은 공포와 폭력과 고통에 시달려야했다. 가해자로 또한 피해자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은 -

 

- 자본과 기업 중심의 mb정부, 국민의 경제적 희생위에 기업만을 위한 법제정, 민주주의 무시, 다수당의 소수의견에 대한 압박, 시민 사회, 조직, 노동운동 탄압, 이미 권력인 언론을  더 큰 권력,자본화 유도, 언론의 정권 비판 기능 억제,상실, 신문, 방송, 포탈에서 보여주는대로 상황을 인식하는 국민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삽질을 완료하고 나면 자본과 지주에게 보상이 있을것이라는 그들만의 삽질맹신... -

 

- 그 시대 힛틀러가  절대독재권력을 확보, 유지, 확장하기 위해 선택하고  행사한 정치 기법이 만든 어두운 역사와 닮아있다. 그 시절의 광기가 이 시대의 어리석음과 겹쳐보인다.

 

 

아래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 푸른 나무 1988년 발행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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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 공산당과 노동자 계급은 대중에게 파멸적인 대공황의 고난을 안겨준 자본주의 체제를 타파하고 러시아 혁명의 뒤를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찌를 필두로 한 반혁명 진영은 막대한 사회정책 비용이 필요하고 혁명이 초래할 위험이 농후한 민주주의를 폐지하고 독재정부를 수립하자 외쳤다.

 

이같은 상황에서 1933년 3월 5일의 총선거를 며칠 앞두고 나찌는 국회의사당에 방화를 하는 음모를 실행했다. 그리고 이를 좌익의 소행으로 조작했다. 일반 국민 사이에는 사회불안에 대한 공포와 반공의 분위기가 번져나갔다. 그 결과 나찌당은 총선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어 일당 독재체제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힛틀러는 독일을 재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가장 먼저 6백만의 지지자와 36만의 당원을 가진 공산당을 폭력으로 해산 시켰다. 공산당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무너지는 위기에 빠졌다.

다음의 희생양은 사회민주당이었다. 나찌는 사회민주당의 지방 조직과 운영 조직에 무자비한 테러를 가하고 관공서와 기업체, 조합에서 당원들을 축출함으로써 당을 아래로 부터 붕괴시켰다 . 사민당 지도부는 무장항쟁을 결의한 하급당원들의 열의에도 불구하고 당의 합법성과 상층부에 대한 나찌의 관용조치에 연연하여 눈깜짝할 사이에 지리멸렬하게 무너졌다.

 

곧이어 나찌는 노동조합운동을 전면 금지시킨 다음 정당 결성과 활동의 자유를 봉쇄했다. 고용주들릐 협회나 농민과 상인의 이익단체도 모조리 해산시켰다. 신문,방송에 대한 철저한 검열을 실시하면서 심지어  대학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각급학교의 교과내용 나찌정신을 선전하는 것으로 바꾸어버렸다.자유주의적이거나 양심적인 목사와 신부들 역시 이같은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대중을 "조작의 대상"으로 여겨힛틀러는 각계각층을 철저히 하향식으로 조직했다. 돌력대, 친위대, 소년단...

 

나찌의 '민족주의적'(사실은 국수주의적) 구호에 빈대하는 자는 누구나 '반역자'로 처단되었고 '국가'의 이름을 내세우면 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나찌는 성공했다.그는 도로건설과 토지개량사업, 대규모의 병원과 비행장 건설 사업을 일으키고 기계 대신 인력을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군대와 경찰, 감옥을 대폭 늘이고 군수산업을 진흥시켰다. 친위대만 해도 5만명 이상에 징집제를 실시했다. 이리하여 무려 6백만의 실업자가 물과 몇 년안에 거의 찿아볼 수 없을 만금 줄어들었다. 대공황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나찌는 늘어나는 산업수요에 발맟추어 합성고무와 석탄액화에 의한 인조석유 생산에 열을 올림으로써 전쟁물자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힛틀러는 제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해 잃어버린 식민지를 회복하려고 했으며 표면적으로는'위대한 게르만의 세계지배'라는 광적인 신념이 전쟁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독일 영토 내에서는 더이상 살길을 찿을 수 없는 독점 자본의 활로를 찿기 위해서 였다. 1937년 12월에 힛틀러의 오른 팔 괴링이 한 연설이 그것을 대변한다.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즉 전쟁준비를 빨리 갖추기 위해서) 지금으로서는 채산이

      맞지 않더라도 생산을   강행할 수 밖에 없디. 비용이 얼마 들어도 관계가 없다.

      전쟁에 이기면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찌는 독점자본가나 군부, 관료의 민중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계급 독재였으며 가장 노골적인 형태의 전체주의 국가 였다. 당시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던 인조 석유와 인조 섬유는 원가가 매우 많이 먹혔고 합성고무는 천연고무보다 부려 7배나 비쌌다. 거대한 중화학공업분야의 자본가들이나 금융 자본가들은 값싼 원료와 넓은 시장, 수지맞는 투자대상을 제공해 해외 식민지를 목마르게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