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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생활

헛물 켜십니다, 고은 선생

지난 주에 노벨문학상 발표가 있었다.

고은이 받을지도 모른다고 미디어들이 너스레를 떨었고 많은 카메라가 발표시간에 그의 집 앞을 지키는 소란을 떨었다. 많은 신문 방송 기사들은 서로 베낀듯 유럽 출신 소설가가 몇 년을 이어서 수상하였기에 이번에는 다른 대륙 출신이며 다른 장르 즉 시인이 수상할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수상자를 문학적 가치와 성취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월드컵, 올림픽 개최지를 정치적 상업적 득실을 따져 지역을 결정하듯 문학 평가에 적용하고 종목(?) 안배까지 예상하는 건 지극히 한국 미디어스러운 사고 습관이다. 그렇게 정치적, 지역적, 종목별 배점에 능한 한국미디어가 왜 고은인지, 왜 그의 문학 인가라는 평가 기사는 쓰지 않은 듯 했다.

 한 주가 지나지 않은 오늘, 사람들은 노벨 문학상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노벨상은 일년에 한 번 지난 해와 다를 바 없는 미디어의 연례 기사거리다. 내년 이 맘 때 그 기사가 다시 올라 올 거다. 노벨상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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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고은이 수상 못한 것은 우리말이 특별해서 번역하기 어렵고 번역에서 많은 것을 잃기 때문이라고 아쉬워 한다. 우리 말, 詩에는 유럽어와 다른 특질이 있어 번역에서 잃는 것이 있다. 동시에 원문의 의미가 풍부하고 감정이 살아있는 경우, 번역을 통하여  모호함이 다듬어 지고 원문의 의미와 감정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원문이 빈약하면 번역문도 POOR해 질 수 밖에 없다.  

외국 문학은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잃은 것이 없는가? 우리말로 번역된 많은 해외 문학을 읽고 감동하는 건 뭐란 말인가?  그건 세계에 통하는 보편성 때문이다. 수상작은 주로 유럽어지만 소수 언어 핀어, 이디쉬, 히브리어, 일본어로 쓴 것도 있다. 훌륭한 문학은 언어와 단어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受賞한 많은 문학이 번역을 통하여 세계적으로 시대를 넘나들며 읽히고 있고, 노벨상이 동시대인을 감동시키는 뛰어난 문학을 인정하는 거라고 보면, 뛰어난 문학정신과 기량은 시간, 언어의 차이의 벽을 넘을 수 있다.

벽을 탓하지 말고 키를 아쉬워할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은만큼 많은 양의 시를 평생 쓴 사람이 없다고 하며 그의 열정을 찬탄한다. 그는 끊임없이 써서 많은 시집, 평론, 소설 등을 냈다.  정작 고은 자신은 다작 시인이라고 불리는 걸 싫어한다고 하며 오래된 자신의 시를 자신이 쓴 건지 기억 못한다고 한다.  

그의 글 중 꼬부라진 시선, 인물을 깎아 내리는, 독한 소리 때문에 비판 받는 만해 평전이나 이상 평전, 미당 평전 이외에  무엇이 관심을 받는 지 모르겠다. 그의 글이 지성과 문학에 기여하는가 또는 거품 낀 브랜드를 표지에 달고 고약을 떠는 것으로 해악을 끼치는가 또는 무관심 속에 책방 한켠 자리나 지키고 있는가? 만인보 등등 많은 시집 중, 어떤 것이 독자에게 읽힘으로 살아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글을 많이 썼다는 게 훌륭한 문학과 무슨 관계인가? 量이 예술의 질을 보장하나? 박춘석이 천 곡 이상의 힛트곡을 작곡했다. 양이 많다고 박춘석이 베토벤 되지 않는다. 이미자가 천 곡 넘게 불렀다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되는거 아니다.아니다. 그럼에도 박춘석, 이미자는 전국민이 노래에 담긴 정서 나눠 부르게 하는 애송곡이 줄줄이다. 그는 박춘석, 이미자가 받은 대중적 공감에 해당하는 어떤 것은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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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가 훌륭한가? 그 평가는 전문가 몫이고 나 같은 보통 독자는 시가 잘 읽히는지, 느낌, 의미를 공감하는지, 감동을 주는지, 다시 읽고 싶은지 그런 것으로 좋은 시와 아닌 시를 구분할 거다. 이런 시는 읽히지 않는다. ..  

저믄 別刀原에서 - 고은 

"이 유월의 유동나무 잎새로써

그대 襟度는  넓고 보드라와라.

저믄 들에는 노을이 短命하게 떠나가야 한다 .

산을 바라보면 며칠째 바라본 듯하고

나만 저 세상의 일을 알고 있는 양.

벌써 들쥐놈들은 바쁘고

낮은 담 기슭에 상치는 쇠어간다.

모가지를 달래면서 소와 말들은 돌아가

차라리   馬珠樹꽃을  싫어하며 빈 새김질을 하리라.

이제 저문 어린애 제 울음을 그친 귓속으로

내 등뒤에 하나인 것이 너무나 많고.

저 九州 下弦달 단 하나만 늦게 떠올라 오리라."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다. 비 문법적이고 작위적인 단어의 사용이 거북하다. 쓸쓸한 유월 저녁 들판 이미지 몇을 고은 내면의 무엇과 엮었다. 사전에 없는없는 단어, 造語, 옳지 않게 쓰인 조사와 부사가 의미 전달을 막는다.    무슨 뜻인지 모를 제목을 포함, 유동나무, 馬珠樹, 九州 등 단어의 의미를 풀 단서가 없다. "싫어"는  현재 진행형 동사어미 "하며"를 달지 않는다. 우리말 사용법과 소통여부에 개의치 않았다.  

고은이 쓴 이상 평론의 한 문장이다.

 "李 箱은 한말 고종치세 이후 명료한 가계를 통해서 전형적인 서울사람이라는 체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땅의 문학이 모범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말해질 때의 지방사 대상의 작가에 상반되는 특수성을 그가 가지고 있는 사실이다."

 의미 파악은 둘 째 치고, 읽을 수가 없다. 주어와 목적어를 구분할 수 없게 조사를 사용하고, 수동태를 써서 문장이 난삽해 진 결과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단어 선택이 잘못 되었고, 군더더기, 문장 구조는 조악하다. 주어, 목적어가 불분명하니 직역도 의역도 불가하다. 스스로 의미를 선명하게 다듬지 않은 (또는 갖지 않은) 상태에서 문장에 무게를 담으려고 한 결과이다. 이런 글을 시 형식에 담으면 위의 시처럼 된다. '고종 치세 이후', 명료한 가계''전형적인 서울사람'은 뭘 의미하는가. 그가 의미하는 바를 밝힌 적도 없지만 밝혔다고 해도 의미에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같은 책의 다른 문장 하나. 문장은 번잡하고 의미는 불투명하다.

"문학의 20대란 극소수의 작가 이외에는 말해질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아동문학이기 때문이다. 이상을 이런 판단 가운데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거기에 이상의 유예부분이 남겨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없다. 만약 우리 문학이 더 성장한다면 이런 이상문학에 대한 더 관대한 노파심을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어느 대학강연에서 이론은 장애가 될 뿐이다라고 하며 시론 대신 자기 살았던 이야기를 하겠다 하였다. 자신의 감성 흐름에 따라 허무, 상실에 대한 시를 쓰며 살았고 자기 인식을 개념화 이론화하지 못하기에 그는 구체적이고 이론적인 답을 요구하는 질문에 선문답 식의 짧은 말로 대응하며 살아왔고 그에 대한 콤플렉스를 숨겨왔다. 모양 냈으나 조악한 위 문장에서 컴플렉스가 드러난다. 그런 예는 무수히 많다.   

아래의 시는 민족이여 조국이여 영탄법을 과잉으로 쓰고  직접적인 단어를 반복 사용하여 글에 구호 같은 느낌을 준다. 중고생 백일장에서 나오는 습작과 다르지 않다. 고등학생 백일장에서 봄직한 고은의 글이 있다. 김연아가 금메달 땄을 때다.

 

 


 '무엇은 무엇이다', '무엇을 했다'는 단정적 말투로 연아는 태극기, 대한미국,  온 누리, 온 누리의 대한민국이라고 한다. 단조롭고 딱딱하다. 찬양구호 같다. 믿습니까? 아멘! 의 무한 반복이 떠오른다. 월드컵 구호  "꿈은 이루어 진다"가 훨씬 시적이다.

 글 어느 구석에도 시의 주제 - 고독하고 오랜 고된 훈련을 이겨낸 인간 연아는 없다. 연아의  퍼포만스를 찬탄하는 듯 하지만 연아 이름을 빼면 연아임을 알아볼 표현이 없다. 연아를 박 지성으로 바꾸고 "네 하늘의 춤"을 녹색 잔디 위의 춤으로 바꿔도 된다. 투명한 풀장 물 속의 빛나는 물고기의 춤을 넣으면 박태환을 위한 글도 된다. 시의 주제에 대한 관찰, 이해, 애정이 보여야 할 자리에 자기 흥분을 날(生)로 드러냈을 뿐이다. 대상(연아)과 시적 교류가 없으니 독자가 동감할 턱이 없다.

 집단을 선동할 때 동원하는 태극기, 대한민국, 온 누리같은 단어들을 연아라는 매개로 엮어 한 인간의 성취를 대한민국으로 수렴한다. 태극기=대한민국=동서남북=온 누리=감동을 앞뒤로 반복하더니......뜨거운 눈물 씻어내러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란다. 연아의 눈물이 대한민국을 위한 눈물인지 자신이 바친 혼신의 시간을 기억하는 눈물인지 누가 알랴.  "지상의 불길", "벌판의 넋"이라는 케케묵은 표현은 2010년에 쓰기에는 곰팡내 난다. 

 나이든 시인으로 한 인간의 밝음과 어두움에 둔하여 성취를 대한민국의 영광으로 몰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50-60년대식 상투적인 사고가 저~렴~하거니와, 이것은 그의 전체주의적 (국가)권위주의적 사고의 표현이다. 국가, 민족 권위주의 사고로 인간이 주체로 살아있는 시를 쓸 수 없다. 고대가 낳은 김연아라는 광고 카피에 사람들이 코웃음을 쳤다. 당사자의 성취에 아무 관련이 없는 조직을 가져다 붙이며 동질성을 홍보하고 선동하고 무임승차하는 것에 대한 코웃음이다. "우리도 연아처럼" 슬로건을 내 걸었던 한나라당이나 연아에게 대한민국 가져다 붙이는 고은이나 고대나 다 닮아있다. 

 특정 한 사람에 대한  두 시를 비교한다. 황지우의 추모시다. 갑작스러운 부음에 갑작스럽게 쓰인 한 사람의 행적에 관한 시라는 점과 승리에 급작스럽게 쓰인 한 사람의 성취에 대한 시라는 점에서 두 시의 탄생은 닮았다. 그러나, 황지우의 추모시에서는 추모 받는 이의 굴곡진 삶이 우리의 구체적 생활의 이곳 저곳에서 만나며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펼쳐진다. 존경과 다정이 그득하여 읽는 이도 돌아간 이를 그리게 한다. 그의 고향의 염소도 파도도 잠시 그를 보내는 시간을 갖는다. 그를 상실하였지만 그를 묻는 것은 망각이 아니라 약속이라는 약속. 잠깐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이게 한다. 대한민국, 역사, 민족을 이르는 단어 한자 없어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내 옆에 숨쉬었던 사람인양 기억하게 한다.


l

자공이 물었다. 선생님,

한 생이 다하도록 해야 할 게 있다면

그게 뭘까요. 선생은 머뭇걸리지도 않고 바로 말했다.

그거? 용서하는거야. 

II

그분이 가셨다.

2009년 8월 18릴 오후 1시 43분,

나는 성프란시스고 회관으로 걸어갔고

정동 오래된 느티나무의 더 굵어진 빗방울이

우산에 후두둑 마침표들을 찍었다.

그때 세브란스 뒤편 백양나무숲도 진저리를 쳤으리라.

한세상 우리와 함께 숨 쉬었던 공기 속에

한분의 마지막 숨결이 닿았을 때

소스라치며 빗물을 털어내는

백양나무의 그 무수한 낱말들;

그분이 가셨다고, 그분이 가셨다고

어디선가 문자 메세지들이 연달아 들어오고,

광화문 광장, 꽉 막힌 차량들 사이로

잠시 짜증을 멈추고

사람들은 인왕산으로 몰려가는 먹구름을 보았다.

지하철 계단을 바쁘게 뛰어오르던 자들도,

담배 피우러 복도 난간애 나온 젊은 사원들도,

기차역 대합실의 늦은 휴가객도, 증권거래소와

통신사 사람들도 뭔가, 순간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시간의 정지 속에 멈춰 있었다.

그분이 가셨다.

III 

당신이 잠시 붙들어 놓은 시간 속에, 이젠 모자를 벗고 머리 숙이는 길손들은 없지만,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가 잠깐일지언정 당신을 생각했을 거예요. 돌이켜 보니, 우선우리가, 당신과 참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들고요, 여든 다섯 성상의 굴곡 많은 당신의 생을 가로지르는 동안 우리가 당신의 동시대였다는 게 자랑스러워요. "나는 그때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영광의 대가로끌려가서 고생한 사람들도 많았지만요. 저는 당신을 한마디로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은 '목소리', 그래요, 목소리였던 같아요. 당신은, 우리 젊은 날, 그 모질고 깜깜했던 얼어붙은 시대를 건너오는 목소리였어요. 당신 가슴속 다이몬에서 나온 그 목소리, 하마터면 비굴해질 뻔했던 우리를 다시 세우고, 우리가 헤멜 때 꼭 어떤 곳을 가리켰던 그 목소리에는 때로는 전율과 눈물이 때로는 얼마간의 피가 섞여 있었지요. 언제였던가요, 대구 유세 때였을가요,그 목소리는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하지 않고 주문 걸린시대의 맹목을 향해 준열히 꾸짖음으로써 돌멩이들을 허공에 정지시켰드랬습니다. 그 피맺힌 목소리를 우리는 잊지 못합니다. 또 당신이 통곡을 터뜨리는 몇몇 장면들도 우리는 잊지 못합니다. 순안 공항에 내렸들 때 트랩 위에잠시 서서 동원된 환호성 대신 멀리 붘녘 산하를 망연히바라보시던 당신 모습을 정말 잊을 수 없어요. 테러, 납치, 가택연금, 목숨을 요구하는 군사법정 그리고 투옥으로 점선을 이루는 당신의 생의, 정말 파란만장이라는 말로도 모자란, 그 유명한 드라마 가운데 아마 그때가 최정점이었겠지요. 참, 당신처럼, 한세상 나와서 인생을 이렇듯 엄청난 용량으로 살아낸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요? 당신이 대단하다는 건 바로 그거라고 생각해요. 세상의 온갖 욕됨까지 다 받아들이고 그 숱한 사람들의 소망을 다담아 '한껏' 사셨다는것. 최선을 다하여 살아냈다는 것. 생을 한 점 그을음 없이 다 태워냈다는 것. 그 가운데 우리가 가장 경이롭게 생각하는 건 이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따라 하려해도 잘 안되는 걸 당신은 하셨는데요, 그건 용서였어요. 우리도 삶의 나이테가 굵어지면서 그 안에 꼭 한두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자 혹은 용서하기 힘든 자 들이 나타나 새벽의 어둠 저편을 노려보게 되거든요. 그러나 당신은 당신을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었던 사람들의 두려움을 기꺼이 풀어주고, 끊임없이 당신을 모략의 언어로 주문을 거는 자들까지 마침내 당신의 주검 앞으로 불러냈습니다. 아, 그래요, 용서하였으므로 당신의 생은 위대합니다. "그렇게 해서",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이 세상에서 뛰었던 당신의 맥박과 혈압을 스스로 내려놓으시고 이 땅에 함께 쉬었던 숨을 스스로 다 내쉬고 당신은 이 지상의 생을 완성하셨습니다. 지금, 당신을 영원한잠에 들게 한 저 관 속에는 이 땅에 슬픔을 가진 모든 어머니들의 눈물을 대신 닦아낸 손수건이 당신 가슴 위에 놓여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세상의 눈물을 가지고 가시는 당신, 아름답습니다.

 IV

호모 에쎄, 에쎄 호모,

이 사람을 보라,

지나가는 자들이여 잠시 서서 보라,

여기 한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그를 묻는 것은 망각이 아니라

어떤 약속을 심는 것이다.

V

 하의도 동쪽 기슭,

일제히 뒤집어지는 풀섭에서

흑염소들이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네

먹구름 밀어내는 은박의 바다를.

 

 시인 황지우

 

 학생 습작 같은 고은의 다른 행사용 시 한편.

 천안(天安) 삼거리-고은

 <하늘의 평안이

 하늘 아래 평안이라오

 하늘 아래 평안이

 하늘의 평안이라오

 천안

 사는 곳

 오가는 곳

 서로 손 흔드는 곳>

 초등학생이 무성의하게 쓴 동시 숙제 수준이다. 天安의 대학생들 앞에서 고은이 낭송했다 하는데, A는A"이다, A"는 A이다의 유치함에 듣는 사람들, 참 민망하였을 듯하다.

 지명을 제목으로, 시 속에 지명을 풀어 쓴최정례의 병점(餠店)을 옆에 놓아 본다. 

   병점 - 최정례

 <병점(餠店)엔 조그만 기차역 있다 검은 자갈돌 밟고 철

 도원 아버지 걸어오신다 철길가에 맨드라미 있

 었다 어디서 얼굴 수탉 울었다 병점엔 떡집 있었다 우리

 어머니 날 배고 입덧 심할 때 병점 떡 한 점 떼어 먹었다

 머리에 인 콩 한 자루 내려놓고 또 한 점 떼어 먹

 었다 내 살은 병점 떡 한 점이다 병점은 내 살점이다 병

 점  철길가에 맨드라미는 나다 내 언니다 내 동생이다 새

 마을 특급열차가 지나갈 때 꾀죄죄한 맨드라미 깜짝 놀라

 자빠졌다 지금 병점엔 떡집 없다 우리 언니는 죽었고 수원,

 오산, 정남으로 가는 길은 여기서 헤어져 끝없이 갔다 >

 어머니 입덧을 달래고 내 살 점이 되었던 병점에는 떡이 없다. 병점은 그녀 안에 검은 자갈돌 밟고 오던 아버지로 수탉 울음소리로 있다. 나였고 언니였고 동생이었던 병점역 맨드라미는 특급열차 다니는 지금 세상에 꾀죄죄하게 깜짝 놀라기나 하고. 기억은 맨드라미처럼 초라해 졌거나 여기서 헤어져 끝없이 가는 길처럼 흩어졌거나. 어머니, 떡, 언니 이어지는 기억 속 존재는 시간이 흘렀고 헤어져 끝없이 갔다. 

   
만인보 서시- 고은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 땅  몇 천리

 마한 쉰 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 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시인은 삼국시대 이래 오래 살아온 땅 조국과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려는 듯 하다. 만인보를 위한 서시이니 아마도 웅혼한 느낌을 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는 막대같이 앙상한 의미를 부풀려보이려는 빤한 시인의 의도가 느껴질 뿐이다. 부여, 마한, 마을, 조국, 땅의 중첩은 한 가지 의미로 허공에 떠 있을 뿐 여러 의미의 중창을 들려주지 않는다. <태어나는 순간><가장 먼 별>은 받쳐주는 댓句가 없어 의미가 불투명한 채 멀리 떠있다. 조국은 원래 하나이니,  하나의 조국의 "하나"는 군더더기이다. 만남의 조국에서 누구도 혼자 일 수 없으니 <헤어져 산다는 것은 확대 >아닌 학대일 것인데, 확대라니 무엇의 확대인지 왜 확대인지 아무 의미 연결 거리가 없다. 이 시는  미완이거나 반 토막으로 보인다.

 

오,  순간이여, 만남이여, 행렬이여, 내일이여 하고 시인 혼자 들떠 부름에  독자는 동화되지 않는다. 그가 독자를 동화시키려면 시적 설득 과정이 있어야 한다. 땅, 시간, 삶이라는 막대기 세 개 박아놓고,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라고 새로울 거 없는 각성을 단정적으로 서술한다.  자기 도취에 들떠 입에 거품 물리게 선동하는데, 사람들은 썰렁한 표정을 짓는 웅변장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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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에서 그는  언어는 소중하니 신중하게 써야 한다고 했다. 시는 다가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시를 가슴으로 쓴다고 했다. 다 그럴싸한 말이다. 그러나  몇 십 년 글을 쓴 사람의 시론으로는 너무도 막연하고 깊이 없다.

 

만인보 서시에서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라고 썻던 그는 작년 여름 어느 강연에서 사람 人자는 서로 기대라는 의미라고 했다. 우주는 억만년이고 인간은 백 년도 못사니 겸손해야 한다고 했다. 법정스님을 이르며 무소유는 미친 소리이며 욕망은 마누라 자식을 잘 먹이고 입히는 거라고 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고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라고 했다. 우리는 부모의 어느 날 밤 잠자리에서 우연히 태어났으니 하잘것 없는 존재라 했다.  짧고 경박한 말이 강연장에 난무했다. 

몇 십 년 째 도사然하던 대로 억만년 우주에 백 년도 못사는 인간이라 겸손해야 한다더니 법정의 무소유를 미친 소리라 욕하고 인간은 보잘 것 없는 존재라더니 욕망을 따라 마누라 자식 잘 먹고 잘 입혀야 한다고 갈팡질팡했다. 내뱉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이라 이랬다 저랬다 엉킨다.

다듬지 않은 생각이 논리도 깊이도 결하고  허황하다. 한 때 머리 깎고 절에 들었던 그가 수많은 존재 중에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어떤 의미인줄 알 것인데 하잖은 존재라고 쿨한척 내뱉고 욕망이라는 철학적 명제에 대해 얕고 즉물적 생각으로 종교적 무소유에 대한 몰이해와 부정하는 말을 들으니 그의 도사연 하는 것은 모두 허세라는 확신이 든다. 허세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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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민주주의, 민족, 통일에 대한 철학과 바라는 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인터뷰를 읽어보아도 表紙적 이야기뿐 속살이 보이지 않는다. 속살이 어떻던 간에 그의 강연, 글을 보니 그는 구태의연한 (민족)전체주의, 권위주의에 빠져있는 듯하다.  민주화 운동으로 겪은 고초와 남북화해 북한 방문 행보는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렸지만 그의 행보가 깊은 각성과 고민의 결과인지 의문이다.

 

 그는 1978년 국가 인권운동협의회 부회장 직함을 가졌었다.

2009년의 모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인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우리 나라도 참담한 달동네가 있다"고 했고,  자신이 "북한에서 직접 현장을 보지 못했다"고 했고, 자신은 "정치가가 아니기에 북한을 변화시킬 힘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가난, 인권 문제를 "국가 최고 책임자에게 해결 하라고 하는 것은......"이라고 뒤를 흐렸다.  

인권을 가난의 문제로 바라보고 인권문제는 눈으로 보아야 파악하는 것이라는 그의 인권개념은 개인이라면  딱하구나... 하고 말겠지만 30년 전 그의 직함을 생각하니 위험하기까지 하다. 인권에 대한 공부와 각성이 없는 민주화 운동은 그 시대의 지식인 따라 하기 허영일 가능성이 있다.  "국가 최고 지도자에게 해결 하라고 하는 것은...."이라는 대답에서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을 알 수 있다.  직접 보지 않았고 정치인이 아니라고 답을 피하는 비겁함이 역겹고 북한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는 말에 시인으로서의 양심을 의심케 한다.

 

그는 만해, 미당, 이상, 김윤식 등 분야의 거목들을 고약한 어투로 비판했다. 그의 비판에 불교계와 문학하는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오갔다. 그러나 그가 가진 허위의 권위와 실재하는 문학 권력에 큰 태클은 없었던 듯 하다.  만해, 미당 등은 그의 앞을 간 스승이었고 김윤식은 한국문학 비판의 한 지평을 열고 그와 오래 어울렸던 학자이다. 고은은 무소유는 미친 소리라고 깎아 내린 법정까지 포함하여 그들을 깎아 내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대중에게 계속 드러내고 자신을 이슈의 중심에 넣는 재주를 부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노이즈 마케팅에 능하여 굴곡을 잘 타고 넘어 오늘까지 왔다. 결국 그는 자신을 브랜드화 하여 문학 권력이 되었다. 출판계에서 고은은 장사 밑천 또는 이권의 대상으로 관리되지 않을까 짐작한다.

 

그는 1975년 만해 평전에 만해는  정치적 선동가, 그가 쓴 건 시가 아니라 푸념, 그의 정신세계, 활동은 시기와 허영이라고 왜곡 평가 절하하였으면서도 1988년 만해 문학상을 받았고 1999년 만해 축전위원장을 맡았다. 고은이 만해에 대해 진심으로 비판적이라면 만해를 기리는 상을 수상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은은 영광과 감투를 쫓아  이중적 삼중적 인격의 처신도 마다 않는다.  그는 상당액의 만해 축전위원회 운영자금을 써서 노벨상등 국제적 상에 영향력이 있는 해외 인사들을 초청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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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는 국민이 많으니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에 기회가 올 수도 있겠고 시인이 받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널리 통하고 오래 살아 남을 예술의 품격을 갖추지 못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시인이 받는 건 반갑지 않다. 소통될 수 없거나 습작 같은 문장을 줄바꿔 시라고 남발하는 시인이 수상하면 한국문학이 창피하다. 사고가 파편적이고 편협하고 내적 진실이 의심되는 행보를 걸었고 대중에게 과대 포장되어 실재와 유리된 사람이 수상한다면, 그의 기만을 허하는 셈이 된다.

 

그는 그가 말 한대로 언어는 소중한 것이니 신중하게 써야 할 것이다. 이상 평론, 만해 평론 등에서 그는 말을 함부로 했다. 그는 많이 찍어 낼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 받고 오래 남을 것으로 고르고 다듬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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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노벨 문학상이 발표되고 난 뒤, 모 일간지에 시인을 위해 준비한 찬사들은 모두 1년을 묵혀야 한다고 하고, 국민적 바람과 관심이 하늘같이 높으니 오래 살아 상 받기 바란다는 칼럼이 실렸다. 포탈에 실린 이력이나 읽고 그가 거목이니 각목이니 해가며 바람개비를 돌린다.

신문의 논설위원님들아~, 바람개비 돌리느라 애쓰지 마시라. 입김으로 바람개비 돌린다고 바람이 부나, 바람이 불어야 바람개비가 돌아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