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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마음의 이삿짐

아침에 눈을 뜬다. 햇살이 사선으로 방에 들어와 내 눈 뜨기를 내려다 보고 있다.  아침부터 따스한 노란 색. 내 몸이 집에 감싸인 듯 포근하고 부드럽다.   

밖은 영하. 강물이 푸른빛 냉기를 쏘아올린다. 밤 섬 가장자리에 하얗게 입김이 얼어 붙었다. 아침 일찍 뜬 해가 서쪽 끝 한강 하구로 내려 갈 때까지 거실 깊이 해가 들어 늘 환하고 명랑한 이 집. 눈이 오면 창 밖이 온통 조용한 회색. 흩날리는 눈 바라보다 간 데를 잃고 나면 밖은 묵음. 하늘이 깨질듯 차가운 차가운 날씨에도 안에서는 병아리털같이 노란 햇빛에 따뜻하고 편안하다. 화분에 올라온 새싹이 봄이 오기전에 봄을 알린다. 여름에는 창으로 쏱아지는 열기와 작은 창때문에 답답하고 괴로웠으나 여름을 몇 해 보내면서 防暑방법도 생겼다. 블라인드, 중문, 커튼으로 여름도 지낼만해졌다.

땅을 딛고 비 오는 소리 듣고 눈이 흙 위에 내리는 모습 보고 살려고 이사 가기로 했다. 여름부터 가으내 여러 사람들이 집을 보고 갔으나 별 진전이 없다가 갑자기 이사가 결정되었다. 두 주일 후에 이사간다. 집을 한 번 둘러보고 결정한 내 뒷사람이 발견할 하자에 신경이 쓰인다. 가기 전에 살면서 망가진 부분을 손보고 있다. 몇 달 전인가, 화장실 손잡이가 망가져 갇힌 적이 있었다. 혼자 화장실안에서 온갖 궁리를 하다가 유리로 된 화장실 문을 깨고 나왔다. 갈라진 유리를 테이프로 붙이고 몇 달을 살았다. 문설주의 홈을 메꿨을 뿐  밖에서는 열리고 안에서는 안열리는 핸들도 그냥 놔두고 살았다. 이사오는 사람은 가족 없이 혼자란다. 나는 가족이 돌아올 때 까지 버티면 되지만 그가 갇히면 큰일이다.  유리집을 불러 유리를 갈고 동네 공사하는 이를 불러 문 손잡이를 갈았다. 누런 물때가 민망해 양변기도 갈았다. 떨어져 나간 가구의 무늬목을 본드로 붙였다.  손 볼데가 어디 더 있을까.

세상이 휙휙 변하는 시절에 십년을 넘게 살았고 많은 일을 이 집에서 치루었다. 월드컵 잔치에 아들 친구들 사이에 껴서 상암동, 신촌서 놀았고 아파트 이웃들과 망년회중 노무현이 당선되는 걸 보고 (혼자)손뼉쳤고 노무현의 FTA에 분노해서 시청 앞으로 달려나갔다. 큰 애가 이십대를, 작은 애가 고등학교, 대학교를 이 집에서 무탈하게 다녔 고맙다. 밝고 환한 기운 덕이리라 생각한다. 강변북로를 따라 달리며 아침 해를 마주 했고 퇴근길에 지는 해를 마주했다. 황홀한 석양에 취해 강변을 달려 집으로 오는 저녁에는 길이 막혀도 좋았다. 석양이 걸려있을 때 옥상에 올라 한강 하류 가양동, 김포 하늘 위로 해가 저무는  것은 보는 건 큰 호사였다. 해 지고 어둠이 오기 전 하늘이 서서히 잉크빛으로 물드는 시간, 하루가 저무니 마음이 서늘해지는 아름다운 시간.

오늘 마침 그 시간에 창 밖을 바라보고 섰다가, 큰 애에게
-엄마는 잉크빛 하늘 이 시간이 제일 좋아. 여기서 바라보던 하늘빛이 그리울 거 같다. 넌 이 집에서 제일 좋은 시간이 언제니 하고 물었다.
-제일 좋다기 보다... 아침에 미닫이 열면 베란다에 모여있던 따뜻한 공기가 들어오는데, 나무 냄새하고 습기하고 섞여서 그게 좋아... 한다. 키 큰 화분들과 난을 큰 애 방 앞 베란다에서 키웠는데, 공기 질이 달랐던 모양이다. 

어느 집에서 산다는 말은 이웃을 포함한다. 옆집 여자가 김치를 주었고 나는 파전을 부쳐주었다. 중학생이었던 옆집 꼬마가 숙녀가 되는 걸 보았고 그 집 남자가 부부사움 끝에 주먹을 휘두르면 옆집 여자는 우리 집으로 피신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그 남자는 흠흠흠 시치미를 뗀다. 나도 모른 척 우아하게 인사하고 만다. 집에 이상이 생기면 내게 전화하는 아랫집 혼자 사는 할머니. 요즘은 통 호출이 없다. 윗집 딸 결혼식에 초대받고 이웃들과 어울려 갔고, 그 집에 시부모가 합가했고 시부 초상에 이웃들과 문상갔고, 뚱뚱했던 윗집 여자 몸이 반쪽이 되었기에 여자들끼리 걱정했다. 그런가하면 아랫집이 아이 둘을 결혼시키면서 청첩하기에 결혼식장에서 부조하고 밥도 못먹고 돌아왔는데, 그 아들도 딸도 내 얼굴도 알고 내 참석도 아는데 마주쳐도 인사가 없다. 문 닫고 위아래층 사는 아파트 관계는 거기까지이겠지 하고 만다.

경비가 몇 번 바뀌었는데, 과로하지 말라 말려도 하루종일 무리하며 일하던 경비 아저씨가 갑자기 쓰러졌다 해서 이웃층 아주머니들과  병문안 갔던 일. 초등학교 교감을 하다가 아파트 경비로 온 아저씨와 집 앞 테이블에서 소주 마시다가 아저씨가 자기 이야기 끝에 확 취해 버렸던 일. 새벽 교대 시간 맞춰 나오느라 투표 못했다기에 아저씨 투표소 보내고 내가 경비 근무 섰던 일. 눈이 계속 왔던 언제인가, 하루 종일 눈 쓰느라 경비 아저씨 담 들렸다기에 눈삽질 몇 번 하고 손에 물집 잡혔던 일.  삽질 몇 번에 인사는 그 열배는 받았다. 이웃사람 차가 내 차를 우그러뜨리고 나갔는데, 이웃사람은 오리발. cctv보자니까 이웃간에 분란 날까봐 보여줄 수 없다던, 결국 경찰이 와서 해결하게 만든 완장찼던 경비아저씨.

이웃 철물점, 유리 샷시집...그 자리에 뿌리 내린듯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고 살던 사람이 조금씩 떠나고 이제는 음식점, 카페들이 여러 얼굴로 생겼다 바뀐다. 의자에 앉으면 어떻게 할까요 묻지 않고도 예쁘게 머리 말아주던 10년 단골 미장원, 미용실 옆에 붙은 방에서 동네 이모들과 놀면서 자란 꼬마가 고등학생이 되었다. 야채 트럭이 자리잡은 다음에 장사 접어버린 야채할머니, 요즘은 뭐 먹고 사는지. 부부와 처형 세사람이 20시간씩 문 열었던 상수S마트, 그 자리는 똑같은 간판의 달걀귀신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처음 몇년엔 곧 떠날 듯 서로 마음을 주지 않던 집이 이제는 오래 입은 옷처럼 편안하다. 살다가 마루에 패인 자국처럼 행복과 미움의 시간은 마음에도 자국을 남겼다. 처음 패인 홈에 안달하다가 익숙해지듯 마음의 자국에도 익숙해진다. 익숙한 궤적과 습관을 뒤로하고 지난 시간을 보니 매달렸던 거 얻고자 힘쓰던 거 별 거 아니었구나... 늦게 깨우친다. 그래서 삶은 돌아보면 언제나 미흡하다. 이삿짐은 초라하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가 보다. 이곳에서 햇빛과 하늘과 강과 베란다의 화분들과 이웃과 골목길과 함께한 시간은 내 안에 퇴적되어있다. 새로운 공기와 흙과 이웃을 만나러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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