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즐기는 멕시코 미술
숙명여대 미술관에서 멕시코 미술전이 있었다. 40여점, 한 작가당 한 점씩. 화면으로 보았던 디에고 리베라를 빼면 모두 첫대면이다.
아즈텍 이전의 문명, 아즈텍 제국, 코르테즈 정복 이후 스페인 식민지, 하필이면 이웃나라는 미국, NAFTA로 경제는 개굴창에 빠져...역사가 참 기구하고 고통스럽구나, 정복자와 섞인 피, 정체성에 대한 질문, 독립 이후의 다층적으로 복잡한 사회. 그게 멕시코에 대해서는 아는 전부다. 멕시코라는 복합적인 역사와 문화의 퇴적층에서 사는 예술가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까. 아는 거 없으니 그림을 내 맘대로 받아들인다.
Yolanda Andrade. ME ICO CITY ART GALLERY
장식적인 액자가 걸린 배경은 길거리 낙서와 그래피티. 벽 앞에는 뜬금없는 금장식을 두르고 섬세하게 직조된 페이즐리 무늬 의자가 놓여있다. 써갈긴 낙서와 푸른 핏줄 돋도록 큰 소리로 부르짖는 듯한 그래피티를 덮은 꽃그림 액자는 거칠고 어지러우나 살아있음과 섬세하고 장식적이나 죽어있는 듯한 대비를 보인다.
갸름한 액자 속 화려한 꽃에는 배경이 없다. 금장식이 호화스럽고 고급스러운 운 의자는 여러가지 색과 아우성이 뒤섞인 벽을 등지고 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는 배경이 있다. 배경없는 또는 배경과 조화하지 않는 존재는 죽었거나 의미 없는 것. 생명없고 배경과 동떨어진 장식으로 커다란 실체를 덮으려는 것은 부질없거 어리석은 짓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리...가 떠오른다.
작가는 극명히 유리되어있는 두 세계를 겹쳐보임으로 '이것이 진실 또는 알고있어야 할 것'이라는 메세지를 보낸다. 의자-액자-큰 소리-그것에 덮인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위치한 낙서의 순서는 작가의 의미 계층에 대한 인식과 치밀한 구성력을 보인다.
Benjamin Dominguez. FLOWERED NUT
액자와 창백한 피부의 주인공은 조화같은 꽃으로 과잉 장식되었다. 그림은 원근 없고 배경없고 평면적이다. 만화처럼 보이는 이유다. 이 초상화는 순정만화의 주인공인가. 대비되는 게, 케이프와 장갑의 레이스는 사실적이다. 어릴 때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 지니고 싶은 것을 만화 속에 과장되게 그렸다.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큰 눈, 레이스 원피스 아래 바비인형처럼 길고 곧은 다리, 하늘하늘한 커튼이 드리워진 창이 있는 양옥집에 사는 소녀. 그런 소녀를 그린 만화의 가장자리는 공들여 그린 장미와 백합으로 채워졌다. 만화를 보면서 숙제와 밥을 잊었고 잊기위해 만화에 빠지기도 했다. 사실적 세밀한 레이스와 비사실적인 장식과잉의 만화같은 인물은 잊고 싶은 현실의 반증일까?
Betsabe Romero, THE WAY TO EL DORADO
엘도라도로 가는 길. 겉만 황금, 속은 텅빈 어둠. 보는 그대로.
Antonio Ruiz, THE PARANOIDS, 1941
재미있는 그림인데, 사진에는 색과 비율이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 제각각인 등장인물의 피부색은 같은 계층, 다른 출신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식민지풍의 건물, 건물 정면에 새겨진 년도, 땅에 떨어진, 밟힐 듯한 그러나 여섯명 눈에 들어오지 않는 오브제, 작은 개. 그림의 대상이 된 구체적 사건, 인물이 있는 거 아닐까.
내민 턱, 주걱 턱으로 오만하고 사기꾼스러운 백인의 특징을 잡았고 검은 피부색의 남자는 큰 덩치지만 다른 피부색의 남자들에게 상호 이끌려가고 있다. 아래로 갈수록 가늘고 휘어지는 다리는 무슨 의미일까. 개성적인 표현이다.
작가이름, 제목을 깜빡...
적막함과 평온함은 한끗차이. 그 앞에서 숨을 쉬니 여러 겹의 오래 된 공기가 흙내 풍기며 가슴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이 그림 좋다.
Richardo Martinez, MATERNITY IN PINK
우리가 경험하는 부드럽고 따뜻한 MATERNITY를 떠올릴 수 없는, 무서운 MOTHER의 분위기는 뭔가. 거대한 석상같은 표정은 돌처럼 무감하여 무섭고 시선을 아기를 보고있지 않다. 아기를 안으려는 자세인가 바닥에 내려놓으려는 자세인가. 아기는 안온하기 안겨있지 않고 두 손은 허공에서 어머니의 가슴을 찾는다. 몸통보다 굵은 팔과 다리는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느끼게 하기 보다 무너지는 하늘도 받아 낼 듯하고 고된 노동을 떠 올리게 하며 아버지가 보이기도 한다. 팔보다 작은 가슴은 아기를 위하여 부플어있기보다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흔적같다. 거대한 발가락은 땅에 박힌듯 공고해 보인다. 이 MATERNITY는 어머니이기도 하고 아버지이기도 한 원시적 대지가 생명 스스로 젖줄을 찾으라는 가혹한 모성인가.
Diego Rivera, URBAN LANDSCAPE OR COLLECTING SNOW
보게되리라 기대했던 디에고의 그림이 아니다. 디에고 적인 그림 요소가 없어 어떻게 봐야할 지 몰라 감상을 미뤄 두었다. 도시의 어느 하루 모습을 담은 듯한 이 그림은 그런데 가끔 보며 생각하니 볼리비아의 포토시가 떠오른다. 포토시의 은광이 발견되고 스페인은 원주민을 동원하여 광맥을 파내려 갔다. 도시의 원주민은 한 번 입광하면 30-40시간씩 계속되는 고강도의 노동에 지쳐 죽어나갔고 주변 원주민의 숫자는 몇년 후 1/10으로 줄어들었다 한다. 16세기부터 18세기 지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원주민, 삶과 땅은 착취당했고 은광이었던 산은 파낸 흙으로 쌓인 폐혀의 산으로 바뀌었다.
거대한 콘베이어 벨트와 트럭, 몇 안되는 인부와 삽의 대비. 힘의 불균형. 계속 돌아가는 콘베이어 벨트와 트럭은 삽으로 눈을 모으는 인부들의 노동 강도를 올릴 거다. 누군가는 힘들게 퍼올리고 누군가는 쉽게 담아간다. 은도 눈도 흰색이다.
Xavier Esqueda, Monolith 1
싱싱한 식물 사이에 자리한 추상적 외양의 돌 조각을 추상적으로 그렸다. 식물의 생명사이 돌의 무생명. 그러나 신화로 현재까지 살아있는 돌조각 Coatlicue를 연상시킨다.
The Archer on Horse ll by Jorge Marin.
그리스,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을 보는 듯하다. 신, 신화속 인간, 영웅. 아름다운 몸의 비율, 근육, 운동감.
천천히 보고 나오니 출출하다. 효창공원 앞으로 나와 늦은 점심을 먹고 분위기 있어보이는 찻집에 들어갔다. 입구에 꽃이 있다.
사퇴발표를 하고 나오는 눈물 맺힌 이정희가 꽃보다 예쁘다. 이 찻집 맘에 든다. 숙대 후문에서 효창공원역 쪽으로 내려 가다 왼쪽에 있는 MADASCAR다. 기분이다. 그래서 에스프레소 더블.
찻집에 걸려있는 사진. 꽃보다 예쁜 두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