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생활

할 말은 해야지

엄마생각 2010. 12. 29. 03:22

2010/10/20 05:30

간간히 신문 쪼가리에서 그가 쓴 기념시들을 읽으며 아니다 싶은 감을 느꼈었다. 20대 때야 상실, 허무를 읊은 시를 동감하는 사치도 자랑스러운 나이여서 그 시절 그의 시 몇 줄을 읽었으나  그 때 읽었던 여러 시들 중 하나였을 뿐 가까이 들여다 보았던 적은 없다.

몇 해 전부터 이 맘 때면 미디어들이 호들갑을 떠는 게 마땅치 않았으나 내가 그의 시를 다 읽은 것도 아니고 이해를 못하겠는 것도 많아, 내 느낌과 다른 그런 평가도 있겠거니 생각했다.

우연히 그의 강연을 듣고 그의 허위와 위선, 바닥을 느꼈다.  

우연히 불교평론에 난 고은의 만해 비평에 대한 반론을 읽고 나니 과거에 느끼고 지웠던 그의 대한 감상이 떠올랐다. 그의 미당 비판 에 실망한 여러 시인들의 글도 보았다.  그의 이상 평론을 읽어보았다.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문학에 대한 비평보다 개인적 병력, 여자, 창녀 등과 어울렸다는 등, 문학 동료 누구와 동성애 정사를 계획했다는 등 성관계, 집안 내력등을 음험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 아니라 이상의 유고 일부가 일어로 쓰였다는 이유로 이광수가 친일로 비판 받았던 것 처럼 비판 받아야 한다는 등(이상이 친일로 비판 받지 않아서 아쉬운 듯) 어떤 숨긴 목적이 있는 듯 고약하기 짝이 없다.  동시에 당상관 벼슬을 지낸 할아버지, 서울 출신, 수재인  점 등이 그의 문학에 어떤 역작용을 했다는 등 동경과 질시하는 시선으로 이상에 대한 소설을 써대고 있었다.  불교계와 시인들이 고은의 만해비평, 미당비판에 대해 비판적인 것이 이해되었다.

 

그는 이상을 읽는 독자들은 문학 지망생이나 젊은 작가들로 한 번 이상을 읽고 나면 이상을 유치한 과거로 돌릴 뿐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이상의 문학과 그를 읽는 독자들에 대한 오만한 판단과 궤변을 꿰어나간다. 그러면서 프랑스의 나이 80먹은 노교수가 연구하는 랭보가 17-18세 때 쓴 랭보문학에는 못 미친다는 사실과 약간 맞아떨어지고 있단다. 글 쓴이의 이중적인 심리가 보인다. 랭보에 비교되는 이상에 대한 질투와 거기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픈.  간 보듯 건드리고 그 안에 아리송한 방어선을 긋는다.   

무엇보다 문장은 엉키고 꼬였고, 뭔 말인지 모르겠다. 한 때 유행했던 짜증-, 지대로다. 책을 던져버렸다.오늘  확인차 이상 평전을 다시 펼쳤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즉각 읽히지 않는 꼬이고 전치된 문장이 장애였지만 꾸역 꾸역 읽었다. 문장을 통째로 읽으니 않되고, 끊어서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썼다. 포기하고 그의 심중과 시선을 따라 읽기로 했다.

 그는 대상의 문학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출생이면 출생, 학력이면 학력, 여자 관계 등에 관한 어떤 것 때문에 굴절된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것에 대해 쓰고 있다. 그것으로 부족하여 이상의 문학이 아니라 이상의 문학을 읽는 독자를 문학적 미성숙자로 단정하고 이상의 문학을 익지 않은 문학으로 규정한다. 글쓴이는 그렇게 이상을 끌어 내림으로써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누구나 자신의 렌즈로 보게 마련이지만 그의 경우 자신이 동경하지만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 질시로 렌즈가 덮혀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개인적 삶을 떠들어 뒷 면, 아랫 면의 못자국, 곰팡이 자국을 찾아 확대경을 들이대고 그것에 대해 자신이 상상하는 허구와  궤변을 덧댄다.

 

책의 앞부분에서 잡히는대로 원문 그대로 옮겨적어 본다.

 

-아무리 그의 문학이 빨리 정리되어 버리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문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상의 정체를 얼마든지 반증할 수 있다. 그는 청년문학이며 대학생들의 덜 성숙한 의식에만 착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17, 18세로서 쓴 씨가 80세의 눍은 교수에 의해서 필생의 작업으로 연구되고 있는 랭보문학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약간 맞아 떨어지고 있다. ...이 점이 이상 문학의 장기화와 함께 그것의 무효성인 것이다. 따라서 그 무효성의 비밀에 이상이 나타난다.-

 

비논리적인 첫 번 째, 세 번 째 문장. 이상문학을 읽는 사람 폄하. 글쓴이의 오만. 문단 전체가 뒤죽박죽. 글쓴이 속이 뒤죽박죽이기 때문. 인정해야겠는데 인정하기 싫은 그러나 약간 인정하는 것으로 꼬리 내리는....

"사실" 은 "평가"또는 "주장"으로 바꿔 써야 한다. 논증에 의해 확인되기 전에는 사실이 아니라 의견, 주장, 평가일 뿐이다. 평가는 주관적인 것이니 누구의 평가인가도 밝혀야 한다. 그는 단어 사용에 많은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을 너무 주장할 때 우리는 아직도 필요한 이상, 현대문학사의 한 점에 있는있는 이상, 어떤 편견도 없이 존재해야 할 이상에 대해서 손상케 할 걱정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비평적 비호를 일삼게 되는 것이다. 특히 폐병, 조루증과 성기능 퇴화와 그의 문학을 만들어 냈을 때의 신체 의학적 불가피성이야말로 그를 동정하고 그를 보호해야 할 작가론의 모럴이 생기게 하기도 한다. 그 뿐 아니라 이상은 한말 고종 치세 이후 명료한 가계를 통해서 전형적인 서울 사람이라는 체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땅의 문학이 모범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말해질 때의 지방사 대상의 작가에 상반되는 특수성을 그가 가지고 있는 사실이다. 염상섭 박태원을 제외하면 이상과 가장 절친했고 동성애 정사까지도 계획했던 김유정조차 지방 출신의 작가였다.-

 문장의 조악함과 불투명함은 더 이야기 할 필요도 없다.

이상의 건강과 성기능에 대한 이야기를 억지로 밝히는 글쓴이의 심리가 음험.

 "지방사 대상의 작가에 상반되는" "전형적인"전형적인 서울 사람이라는 체질"이 뭐냐. 건강과 성기능을 이야기 하다 흘렀으니 유기물 생명체의 질적 체질을 말하는 가 본데, 서울형 체질이 있고 지방형 체질이 있다는 건가? 흰 피부에 긴 손가락 서울 청년형 체질과 시골 돌쇠형의 이분법인가? "명료한 가계"는 개념이 무엇인가? 

무엇보다 기기 막히는 게 "동성애 정사까지도 계획"이라는 표현이다. 글쓴이는 이상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너무도 뚜렸하다. 그에게 동성애에 딛힌 생각이 있는 듯 한데, 그건 그의 생각이니 뭐랄 수 없다. 그러나 "동성애 정사 계획"이라는 말은 글쓴이가 무엇인가 폭로함으로써 시선을 받으며 동시에 이상을 욕되게 하겠다는 의도이다. 글쓴이 스스로  "작가론의 모럴"을 말하면서 문학에 관련되어있지 않은  동성애 성향(사실여부 모름)을 문학평전에 올린 것은 너무도  "비모럴"적이다. 문학과 관계없는 동성애든 이성애든 개인적 성향을 찝은 것, 개인 간의 관계와 "정사 계획"을 수식어로(정면 분석도 아닌) 쓸 생각을 했는지 기가 막히다. 지방 출신 작가 김유정을 수식하는 말로서도 너무 기가 막히다. 

-그는 상식적 건강이 결여되었으며 그의 폐병에 의해서 이상문학은 근본적으로 병자의 문학이 된다. 따라서 그의 병이야말로 그의 문학적 패덕을 극복해 주는 상징적 우월성이었다. 이 폐병은 그를 파멸시키기는 했지만 그가 파멸하기까지의 문학에 대해서 항상 파멸을 이겨내게 하고 삶을 그가 생득적으로 혐오하는 통속적인 외계로부터 방위해 준 것이다.- 

글쓴이 스스로 "어떤" 편견도 없이 존재해야할 이상"이라고 말하면서 이상에 대해 편견을 갖도록 독자를 유도하고 있다.  건강하지 않은 이상의 문학을 병자의 문학으로 부르고 병이 상징적 우월성이라고 하니, 글쓴이가 중 노릇을 했고 귀에 청산가리를 부었고(부었다고 함) 자살하겠다던 자살충동도 글쓴이의 상징적 우월성이 되리라는 논리도 글쓴이의 정신적 비건강성이 그를 외계로 부터부터 방위해 주고 있다는 논리도 가능하리라....  하기야 정신적 비 건강성이 엄청난 사람이 권력을 쥐니 주변이 다 또라이 우월성의 권력을 받들어 주는 시대에 사니 뭐라 할 말 없다.

 -그의 작위가 들어 있는 여성 편력은 바로 외계에 대한 단절을 시도하는 수단으로서 여성을 단절의 기구로 사용할 때 지속된 것이다. 이상은 항상 여자를 창녀나 비정상적인 육감으로 사용했다. 그것에 그가 반대로 관련되려고 해도 그는 도리어 그 자신이 황폐화해지고 그가 시도한 폐쇄성이 분열되어 버리는 비운 때문에 여성을 독일문학의 경우와 같은 결정적 성화 가능성으로 얻지 못하고 좌초되는 것이다.-

 문장이 어지러워 뭔 말인지 모르겠고 헤아리고 싶지 않지만 고은이 뭘 말하고자 하는지 숨은 의도는 알겠다. 글쓴이는 이상을 명예훼손하고 있다. 

-먼저 이상은 철저한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남긴 유고의 소량이 일본어로 씌여져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 점은 이광수의 지도적 친일문학의 후기가 사납게 비난받는 일을 어느 만큼 나눠서 그가 비난받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이상의 부정론을 일으키게 한다. 그것은 이광수에게는 고민이 보이는 일에 대해서 이상에게는 전혀 고민이 보이지 않고 식민지 작가의 개별체의 기능으로 정착한 일도 아울러 지적하게 한다.- 

유고의 소량이 일본어로 쓰여져 있기에 이상이 친일이라는 매도는 무리다. 그럼 다량의 유고는 어느 나라나라 말로 쓰였는가 라는 유치한 질문도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이상이 쓴 글이 친일적이었는가?가 판단의 근거가 된다. 친일하였다고 거론되는 작가들은 친일의 증거를 글로 활동으로 남겼다.  친일로 규정되는 내용과 행적을 합리적으로 보아야 할 것을 고은은 "이상의 부정론"이 일어나기 기대하며  "유고의 소량"을 이유로 이상을 비판의 구덩이로 밀어넣기를 하고 있다.   

결국 그 책 - 고은의 이상평론 - 읽기 집어쳤다. 읽을 이유 없었지만, 글쓴이를 다시 한번 파악해보자는 의도였는데, 이걸로 됐다. 그의 책을 읽으니 마음에 오물이 들어 차는 듯 했다. 惡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