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우리 동네에는 흙이 없어

엄마생각 2012. 2. 6. 13:47
걸을 만한 곳이 없는 게 참 갑갑하다고 하면 배부른 소리가 되나...

이사짐은 창고에 넣었고 나와 작은 애와 철수는 오빠네 집에 묵게 되었다. 이 집은 아침에도 밥과 국을 먹는다. 조카가 출근하기 전에 작은 애가 나서는데, 집에서 안먹거나 오트밀정도 먹던 아이에게 올케는 아침을 챙겨준다. 토스트에서 샌드위치로 어제는 김밥을 말아놓았다. 아이는 그런 대접을 받더니 엄마, 엄마는 혹시 계모야? 하고 묻는다. 조카 출근 시간에 맞춰 밥상이 차려지는데 자겠다고 하면 먹고 자라고 한다. 사람만 챙기는 게 아니다. 그 집 강아지는 하루 종일 주는대로 받아먹어 비대하다. 철수도 덩달아 하루 종일 군것질이다. 철수는 이제 아이들 외숙모를 더 따른다. 그래서 나는 철수에게도 계모가 되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설겆이를 거들고 나면 나는 홈리스라 할 일이 없다. 배는 그득하다. 식구들은 부른 배를 쿠션처럼 안고 테레비를 보거나 컴터 앞에 앉았고 나는 동네를 걸어보기로 한다. 춥다. 목도리를 칭칭감고 장갑도 챙겨 나선다. 

대로에 가까운 주택들은 조그만 사무실로 바뀌었거나 여러 사람이 사는 주택으로 새로 지어졌다. 집을 나서서 왼쪽으로 가면 휘문 고등학교, 오른 쪽으로 가면 대치동 사거리다. 휘문학교 쪽으로 걸어본다. 맞은 편에 학원 간판을 단 건물이 몇 보인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외양으로  분식집이나 철물점이 있다. 아무 감흥이 안나는 길이다. 동북쪽으로 가면 삼성동이다. 휘문학교 옆 담을 끼고 테헤란로 쪽으로 내려간다. 동네가 개발되기 시작했을 때 지어졌을 주택들 몇이 흐린 불을 켜고 남아있다. 그 몇 채를 제외하고 나면 테헤란로 남측 대치동 쪽은 음식점과 술집들이 길 가득하다.  동네 흐름에 그 집들도 헐릴 것이고 살던 사람들은 동네를 떠날 것이다. 음식점마다 불빛 번쩍이지만 춥고 늦어 사람이 없다. 술 취한 남자하나가 길 가운데로 걷다가 휘청한다. 불빛과 간판에 어지러워 걸을 수가 없다. 동네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간판이 어지러워 방문닫고 티브이를 마주하고 있다.

삼성동 대로로 나선다. 길은 갑자기 넓어지고 건물들은 높고 세련되어 맨해튼이나 잘 사는 나라의 번성하는 도시를 걷고 있는듯한 착각이 든다. 보행자가 젊다. 모두 전화기 화면만 들여다 보며 바쁘게 걷는다. 남에게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없다. 모두 화면 속의 얼굴들을 보고 듣지만 옆을 스쳐지나가는 체온이 느겨지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얼굴을 스치고 눈을 맞춰야 인사하고 웃고 이야기하게 되는 건데, 눈길을 구할 수 없다. 오늘 밤 너무 추워서 그렇다고 생각하자.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는게 무수한 개인들의 습관이 되고 사회적 행동이 된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까. 물어 볼 것도 없다. 이미 타인에 대해 무심, 무념한 태도가 극단적인 불행의 발생을 용인하는 거 많이 보지 않았는가.  대치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음식점과 다세대로 채워진 길에 식물 한 포기 없고 뿌리내릴 땅 한뼘이 없다. 걸을 맛이 안난다.

이사 나오던 날 화분을 정리하려고 봉투에 흙을 쏱아 버리려는데, 올케가 우리 동네에는 흙이 없어, 흙 가져갈까봐 했다. 우리가 땅 위에 사는데 흙이 없다니. 동네를 걸으며 그 말을 갑갑한 마음으로 이해했다.  이 동네는 아스팔트에 덮여 숨구멍이 없다. 나무는 커녕 날아다니는 홀씨하나 뿌리내리고 소박하게 앉아있을 흙이 없다. 풀이 자랄 수 없는 곳에는 사람도 늘 어디로 옮겨야 될 거 같아 뿌리내리지 못한다. 촘촘이 들어선 방 한 칸에 몸을 누이는 바쁜 삶에 걸을만한 길 타령이 사치라 할런지 모르지만 걸을 맛은 살 맛하고 같은 의미다. 테헤란로를 저렇게 돈발 날리게 단장할 능력이면 이면도로도 좀 볼만하고 걸을만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도시를 좀 살만하게 만들어야하지 않을까. 간판 정비하라 하고 차는 원웨이로 한갖지게 다니게 하고 보행자길 확보하고 공간 짜서 가로수 심고 가로수 관리 책임 바로 앞 점포에 지우고 가로수 임의로 베면 벌금이고...머리 속으로 아스팔트를 뜯고 나무를 숱해 심고 정책도 세워보았다.